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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조민호의 이렇게 살면 어때(19) “나는 이상한 나라에 불시착한 외계인?”

중앙일보 2017.09.12 12:00
포월침두가 있는 보해산 위에 UFO 같은 구름이 떴다. [사진 조민호]

포월침두가 있는 보해산 위에 UFO 같은 구름이 떴다. [사진 조민호]

 
이상한 나라에 불시착했다. 내 앰프가 고장 났다는 소문이 거창군 가조면에 퍼졌다. TV도 없는 산속의 밤은 길고 적적해서 음악마저 없으면 그 어두운 고요를 견디기가 상당히 힘들다. 무려 20kg이 넘는 앰프를 서울로 다시 데려가 고쳐올 수도 없어 음악 없는 긴 밤이 며칠 계속됐다. 내 사정을 딱하게 여긴 아랫집 목사님이 거창에서 고칠 길이 없는지 이쪽저쪽에 물어보셨나 보다.  
 
커피가 떨어져 원두를 사러 갔더니 사장님이 “앰프가 고장났다면서예~” 한다. 아는 동생이 있는데 오디오를 좀 볼 줄 안다며 바로 전화를 걸어준다. 차로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와 주었다. 그런데 이 앰프 나이가 올해로 딱 40살이다. 많아야 40세쯤 돼 보이는 이 친구, 자기와 비슷한 나이의 앰프를 뜯어보더니 생전 처음 접하는 내부 설계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 이상하네~”를 연발하더니 한 시간 만에 손을 든다.
 
 
거창까지 따라 내려와 제 나이를 망각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다 결국엔 사망해버린 23살 스피커의 생전 모습이다. 사망이유는 6회 참고. [사진 조민호]

거창까지 따라 내려와 제 나이를 망각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다 결국엔 사망해버린 23살 스피커의 생전 모습이다. 사망이유는 6회 참고. [사진 조민호]

 
“제 스승이 있는데예, 함 물어보께예” 하더니 휴대폰 카메라로 앰프 내부 이쪽저쪽을 찍어 어딘가로 보낸다. 5분도 안 돼 바로 답장이 온다. 이 앰프는 요즘 앰프와 달리 직류 앰프가 아니라 교류 앰프란다. 이런 앰프는 자기한테 가져와도 고칠 자신이 없다며 거창도서관 옆에 가면 ‘대영소리사’라는 곳에 도사가 한 분 계시는데 그분이라면 가능할 거란다. 직류? 교류? 도통 무슨 소리인지. 난 이 대목에서 거의 포기했다. 거기 가도 방법이 없을 거라고. 이 앰프는 여기 거창에서 사망하실 거라고.
 
거창에 내려와 평생 망하지 않는 회사를 만들고 이름을 ‘King Of My Life(KOML)’이라고 지었다. 괜히 고물(KOML)이라고 지었나. 온갖 고물과 함께 나도 고물이 되어가는 건 아닌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고수님의 위로에 눈물날 뻔
 
 
고수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거창 ‘대영소리사’ 사장님의 작업실. 수술대 위에 내장을 다 드러내 놓고 누운 40살 내 앰프가 보인다. [사진 조민호]

고수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거창 ‘대영소리사’ 사장님의 작업실. 수술대 위에 내장을 다 드러내 놓고 누운 40살 내 앰프가 보인다. [사진 조민호]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는 앰프를 안고 못 고쳐도 그만이라는 심정으로 거창 읍내로 고려장을 치르러 갔다. 수십 년은 된 듯한 작업실에서 CPR(심폐소생술) 실시 단 두 시간 만에 고물이 다시 숨을 쉰다. 내 예상의 반의 반도 안되는 수리비를 치르고 나가려는데, 고수님이 앉으라 하더니 커피를 내주신다. 왜 내려왔냐, 뭐하고 지내냐, 처음하는 시골생활이 힘들지 않냐, 옛날 잘 나갈 때 생각하지 마라 힘들다, 지나가다 들러라~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받은 격려와 위로에 눈물이 날 뻔 했다. 앰프 고치러 왔다가 있지도 않은 친형을 만난 듯했다.  
 
목사님의 관심에서, 커피숍 사장님의 입으로, 다시 아는 동생의 어설픔을 거치고, 그 아는 동생 스승의 겸손을 통과해, 거창의 고수 손에서 다시 살아난 고물~ 왜 이곳 사람들은 남의 일을 제 일처럼 여길까? 가끔 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내 일도 남이 해야 할 일로 미루고 떠넘기며 살아 온 나같은 도시것들에겐 너무나 낯선 하루였다. 이상한 나라에 불시착한 외계인 같았다. 나 혼자.
 
조민호 포월침두 주인 minozo@naver.com
 
[제작 현예슬]

[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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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호 조민호 포월침두 주인 필진

[조민호의 이렇게 살면 어때] 퇴직은 갑자기 찾아왔다. 일이 없는 도시의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고, 이러다 죽는 날 아침에 “뭐 이렇게 빨라, 인생이?” 할 것 같았다. 경남 거창 보해산 자락, 친구가 마련해준 거처에 ‘포월침두’라는 이름을 지어 붙이고 평생 처음 겪는 혼자의 시간을 시작했다. 달을 품고(抱月) 북두칠성을 베고 자는(枕斗) 목가적 생활을 꿈꿨지만 다 떨쳐 버리지 못하고 데려온 도시의 취향과 입맛으로 인해 생활은 불편하고 먹거리는 가난했다. 몸을 쓰고, 글을 쓰자. 평생 머리만 쓰고 물건 파는 글을 썼으니 적게 먹어 맑은 정신으로 쓰고 싶은 글, 몸으로 쓰는 글을 쓰자, 했다. 올 3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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