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무서운 연주

중앙선데이 2017.09.10 02:00 548호 27면 지면보기
CLASSIC COLUMN
 

an die Musik:
푸르트뱅글러의 바이로이트 ‘합창’

푸르트뱅글러의 베토벤 ‘합창’ 바이로이트 실황 음반. 초반의 디자인을 살려 재발매됐다.

푸르트뱅글러의 베토벤 ‘합창’ 바이로이트 실황 음반. 초반의 디자인을 살려 재발매됐다.

헨릭 쉐링, 아르투르 그루미오, 정경화가 연주하는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의 한 악장을 듣고 누구 것인지 구분할 수 있는가? 나는 자신 없다. 베토벤 월광 소나타 1악장의 ‘루체른 호수의 달빛 비치는 물결에 흔들리는 작은 배’를 에밀 길렐스와 빌헬름 켐프가 완전히 다르게 연주하는가? 나는 잘 모르겠더라.
 
 
주로 음반으로 음악을 듣기 때문에 같은 곡을 여러 음반으로 비교하며 듣기도 한다. 피에르 푸르니에와 야노스 슈타커의 바흐 무반주 첼로가 어떻게 다른지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결국 바흐다. 나름의 개성을 가진 음반들을 번갈아 듣는 호사를 누릴 뿐, 하나만 골라 ‘네가 최고’라거나 ‘너는 퇴출’이라며 내쫓지 않는다.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베토벤이 위대할 뿐, 나는 전달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그것은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그럼에도 음반사에는 대체 불가능한 경지에 오른 연주들이 있다. 글렌 굴드의 평균율은 스타카토 풍의 첫 소절만 들어도 그의 구부정한 등이 떠오른다. 오이스트라흐의 바흐 바이올린 소나타는 바흐의 슬픔이 만져진다. 베토벤 교향곡, 그중에서도 9번은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의 바이로이트 실황이 독보적이다. 그 ‘합창’은 내가 태어나기 10년 전 녹음인데도 여전히 베스트셀러에 꼽히고 올해도 음반을 찍었다. 
 
바이로이트 실황은 오래전부터 음반을 가지고 있었다. 푸르트뱅글러의 베토벤교향곡 전집에 포함되어 있는데, 한 번 듣고 밀쳐 두었다. 염가 반이라 음질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념비적인 연주인만큼 좋은 소리로 듣고 싶었다. 하지만 옛 LP는 귀하신 몸이라 만져보기 어렵고, CD로 듣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마침내 초반 재킷을 살린 LP가 재발매 되었다. 강아지가 축음기 나팔 앞에 앉아 주인의 목소리(His Master's Voice)를 기다리는 그림이 빠지고 워너 로고가 찍힌 것이 아쉽다. 재킷 그림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 즉 하나님이다. 
 
푸르트뱅글러가 바이로이트에서 지휘봉을 잡은 것은 1951년 7월 29일이다. 이 땅에서는 남북한 군대와 중공군, 유엔군이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을 때였다. 반면 독일은 패전의 상처를 딛고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고 있었다. 전쟁으로 중단된 바이로이트 바그너 축제가 그 해 재개되었는데, 푸르트뱅글러가 축제의 서막을 여는 연주회 무대에 오른 것이다. 전범 재판을 받은 푸르트뱅글러뿐 아니라 독일인 전체가 새로운 비상을 꿈꾸는 이벤트였을 것이다.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을 택해 모든 문을 닫았다. 아파트에서 ‘합창’을 듣는 것은 도발에 속한다. 음반이 회전하고, 바늘이 반짝이는 비닐을 미끄러지다 소리 골을 파고들었다. 다른 버전에는 실리기도 했다는 청중의 웅성거림, 푸르트뱅글러가 마룻바닥을 걸어 나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1악장의 긴장된 모티브가 울리기 시작한다. 눈을 감았다. 66년 전 바이로이트 연주회가 거친 입자의 흑백 영상으로 재현되기 시작했다. 
 
무대에 섰던 소프라노 슈바르츠코프는 나중에 “참으로 무시무시했다. 모든 사람이 신경과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 터질듯 한 긴장감이 1,2,3악장 내내 지속된다. 3악장은 느리게 노래하듯 연주하라고 베토벤이 지시했다. 그러나 푸르트뱅글러는 이 낭만적 악장마저도 팽팽한 긴장감으로 일관한다. 간간이 들리는 청중의 마른기침이 숨을 돌리게 한다.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3악장까지는 음질 나쁜 옛 연주일 뿐이다. 긴장이 이어지지만 음영이 두드러지지도 않는다. 4악장에 이르러 푸르트뱅글러는 폭발한다. 앞에서 차곡차곡 쌓아 올린 에너지를 일거에 터뜨린다. 소리가 선명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지만 귀 기울이면 뜨거운 열기에 아연해진다. 바리톤과 테너가 번갈아 부르던 ‘환희의 송가’를 합창단이 폭포처럼 쏟아낼 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환희여! 아름다운 신들의 불꽃같은 빛남이여! 낙원의 딸이여! 우리는 광휘에 취해 빛이 가득한 성소로 들어가자!” 실러의 시가 장엄하지만 나의 가슴을 두드린 것은 지금껏 수도 없이 들었던 ‘환희의 주제’의 단순한 선율이다. 베토벤이, 푸르트뱅글러가 의기소침해 있는 나의 등짝을 후려치는 것 같았다. 피날레의 미친 질주가 끝났을 때는 쾌감에 몸을 떨었다.  
 
연주 뒤 프로듀셔 월트 레그는 “좋을 수 있었던 만큼은 좋지 않았다”고 했고 지휘자 본인도 “형편없는 연주”라고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그러나 절박한 인간들이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거칠고 뜨거운 ‘합창’은 온 세상의 음악애호가를 열광시켰다. 음악을 듣고 후련해지는 경험은 참 오랜만이다. 무서운 음악, 무서운 연주다. 홀로 남겨지면 또 온 집의 문을 닫게 될 것 같다.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