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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글자는 견명체가 좋은 까닭

중앙선데이 2017.09.10 02:00 548호 18면 지면보기
그림1. ‘크기에 따라 시각 보정한 폰트’의 강아지 아이콘. 위로부터 각각 작은 크기, 중간 크기, 큰 크기에 최적화한 모양이다.

그림1. ‘크기에 따라 시각 보정한 폰트’의 강아지 아이콘. 위로부터 각각 작은 크기, 중간 크기, 큰 크기에 최적화한 모양이다.

유지원의 글자 풍경

“이 숫자, 뭘로 보이세요?”

 
시력표의 숫자를 가리키며 안과의사가 묻는다. ‘닫힌 구조의 산세리프 평체로 보여요’라는 대답이 뱃속을 간질이지만, 입으로는 숫자 하나를 말한다.  
 
“이건요?”
 
잘 안 보인다. 나는 생각한다. ‘위쪽의 큰 글자인 3, 6, 8, 9는 서로 비슷하게 생겨서, 아래쪽의 작은 글자인 7이 오히려 구분하기가 더 쉬워요.’
 
“이건요?”
 
입으로 숫자 하나를 말하면서, 나는 다시 생각한다. ‘시력표의 숫자는 헬베티카평체를 닮았네요. 딘서체처럼 열린 구조를 가진 숫자 폰트를 쓴다면(그림 2) 숫자 간의 구분이 쉬워져서, 같은 크기로 같은 거리에서 측정할 때 사람들의 시력이 훨씬 높게 나오겠는걸요.’  
 
같은 크기로 써도 더 잘 보이고 잘 읽히는 모양을 가진 글자체들은 따로 있다. 이런 글자체들은 특히 작은 크기로 사용될 때 저력을 발휘한다.
그림2. 헬베티카노이에(Helvetica Neue) 평체(Extended)와 딘(DIN)서체

그림2. 헬베티카노이에(Helvetica Neue) 평체(Extended)와 딘(DIN)서체

 
눈으로 나누는 대화
몇 년 전이었다. 나는 아이폰을 쓴다. 모바일 운영체제(iOS)를 업그레이드하라는 표시가 떠서 순순히 그러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폰의 시동을 걸었더니, 새 운영체제의 유저 인터페이스(UI) 폰트가 헬베티카노이에 엑스트라 씬(extra-thin)으로 가볍고 날렵하게 바뀌어 있었다. 미소가 지어졌다. “애플이 스크린 해상도에 자신감이 생겼구나!”
 
우리 타이포그래퍼들은 대화를 이런 식으로 한다. 폰트를 보며 눈으로 눈으로.  
 
기존의 컴퓨터 모니터 평균 해상도는 72~96dpi였다. 이렇게 낮은 구현력의 해상도는 섬세한 표현이 가능한 종이 매체에 비해서, 글자들에게도 고달픈 환경이다. 그래도 고달픈 환경에 더 잘 버티는 글자체들이 있다. 이 글자들은 다소 둔중할지라도 견고하고 튼튼하다. 열악한 해상도와 작은 크기 같은 고난의 환경 속에서는 글자들도 작심하고 편한 복장을 갖춰야 한다. 각주처럼 작은 글자를 많이 읽을 때에는, 크게 쓸 때 섬세하고 아름답던 모양들이 거추장스러운 장신구처럼 눈을 날카롭게 할퀴기 시작한다.
 
해상도가 높아지고, 디스플레이 간판처럼 단어 수준의 몇 개 안 되는 글자로 크게 자신의 자태를 뽐내야 하는 환경에서는 글자들은 다시 쇼 무대에 오른 듯 하이힐을 신어도 좋다. 아이폰의 새 iOS에서는 튼튼하고 다소 둔한 기존의 레귤러체 아닌, 아주 가느다란 엑스트라 씬체로 멋을 내고 싶었던 것이다. 세련되고 예쁘긴 했지만, 아직은 사용자의 눈에 조금은 불편한 복장이기도 했다.  
 
개미와 코끼리
개미에게는 개미 크기에 맞는 모양이 있고, 코끼리에게는 코끼리 크기에 맞는 모양이 있다. 글자도 마찬가지다. 스케일이 바뀌어도 우리는 가로·세로·높이가 모두 균등한 비율로 커지거나 작아지고 모든 디테일이 그대로이리라 상상하지만, 그렇지 않다.
 
개미가 그 체형 그대로 코끼리만큼 커지면, 늘어난 몸무게를 버틸만큼 다리의 힘이 충분히 커지지 못해 주저앉고 만다. 동물을 버티게 하는 것은 근육의 힘이고, 근육의 힘은 근육의 단면적에 비례한다. 몸이 커진 개미가 그 몸을 지탱하려면 결국 코끼리처럼 퉁퉁한 다리를 가져야 한다.  
 
반대로 코끼리가 그 체형 그대로 개미만큼 작아지면, 작은 체구에 비해 쓸데없이 힘이 넘치는 동물이 된다. 이렇게 되면 몸의 체온을 유지하는 대사에 문제가 생긴다. 작은 몸이 만들 수 있는 에너지에 비해, 피부의 넓은 면적으로부터 열이 너무 많이 발산되어 저체온증으로 죽는다. 서울대학교 유재준 교수가 교양과학서에서 저술한 설명이다.
 
물론 글자는 동물과는 다른 생리를 가져서, 큰 글자와 작은 글자의 모양에 적용되는 논리 역시 동물과는 다르다. 글자의 논리는 인간의 신체, 즉 당신의 몸과 기분에 맞춰진다. 우리의 시력에는 한계가 있다. 극도로 작은 글자를 보면 눈이 미세한 형태를 감별하지 못해 탈락이 일어난다. 글자는 우리 신체의 이렇듯 유한한 한계를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고, 다독다독 보살피고 보호하도록 만들어진다.
 
그림3. 옵티컬 사이즈(크기에 따른 시각 보정) 폰트인 미니언 프로의 큰 제목용(Diplay)과 작은 각주용(Caption)

그림3. 옵티컬 사이즈(크기에 따른 시각 보정) 폰트인 미니언 프로의 큰 제목용(Diplay)과 작은 각주용(Caption)

미니언 프로 폰트의 예처럼, 크기에 따라 그에 최적화된 형태로 각각 다른 디자인을 한 경우를 ‘옵티컬 사이즈’라고 부른다(그림 3). 24포인트 이상의 큰 크기에서는 제목용(Display) 폰트를, 8포인트 이하의 작은 크기에서는 각주용(Caption) 폰트를 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완전히 다른 복장을 해도 그 사람이 동일인임을 알아본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폰트라는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큰 크기에서는 늘씬하고 예쁘게 보이는 하이힐을 신고, 각박한 환경인 작은 크기에서는 묵묵히 일 잘하려 튼튼한 신발을 신는 셈이다.  
 
작은 크기에서는 단순한 고딕체(산세리프체) 계열을 쓰면 별문제가 없다. 획이 너무 가늘지만 않으면 된다. 하지만 할 수 있으면 또 다 해보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의 이런 마음은 작은 크기에서도 잘 읽히는 명조체(세리프체) 계열을 디자인해냈다. 미니온 프로 각주용을 24포인트로 키우면 둔탁한 음성을 듣는 듯 갑갑하지만, 제 크기에서는 안정적으로 기능한다. 제목용을 6포인트로 줄이면 짹짹 새된 소리를 듣는 듯 피로하지만, 제 크기에서는 우아하다.
 
한글에는 옵티컬 사이즈의 개념을 가진 폰트가 아직 없다. 하지만 기존의 서로 다른 폰트들로 이 원리를 응용할 수는 있다. 같은 명조체 계열이라도 날렵한 세명조체는 큰 크기에 유리하고, 견고한 본명조체는 작은 크기에서 뚝심을 보인다(그림 4).
그림4. 세명조와 본명조. 웨이트를 맞추기 위해 본명조는 라이트를 썼다.

그림4. 세명조와 본명조. 웨이트를 맞추기 위해 본명조는 라이트를 썼다.

 
못생긴 디자인을 감행할 용기
명조체 계열 폰트의 옵티컬 사이즈에 적용되는 논리를 한 디자이너가 강아지 아이콘으로 명쾌하고 재치있게 풀어냈다(그림 1). 맨 위의 강아지가 작은 크기에 적합한 모양이고 맨 아래의 강아지가 큰 크기에 적합한 모양이다.
 
사실 멋지게만 잘 만드는 것도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디자이너가 재능과 훈련으로 쌓아야 할 기본 소양이다. 하지만 맨 아래 강아지처럼 세부를 잘 표현할 줄 아는 디자이너라도, 때로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를 분연히 자제하고는 못생긴 모양의 디자인을 감행해야 한다. 이것이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용기다. 작은 크기나 낮은 해상도의 긴 글을 위한 폰트를 만들 때, 디자이너들은 이런 용기를 발휘한다. 우스꽝스러울 만큼 단순한 생략을 감당한다. 당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히 이해하여, 그 피로를 덜어주기 위해, 그들은 그렇게 한다.  
 
 
유지원
타이포그래피 연구자·저술가·교육자·그래픽 디자이너. 전 세계 글자들, 그리고 글자의 형상 뒤로 아른거리는 사람과 자연의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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