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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밀당

중앙선데이 2017.09.10 01:02 548호 31면 지면보기
일상 프리즘
밀고 당기기의 줄임말이 밀당이다. 갓난아기 때부터 본능적으로 배운 게 밀당이 아닌가 싶다. 거짓 울음으로 어머니의 관심을 유도했던 게 첫 밀당이었다. 청년이 된 뒤엔 남녀 간에 치열한 밀고 당기기를 했다. 당시엔 서툰 밀당에 고민했고 고통을 받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중장년이 되면서 더 이상 밀당을 하지 않는다. 사회생활이 복잡해지고 힘들수록 밀당은 번거롭고 쓸데없는 일이라고 여긴다. 연애결혼한 부부마저 밀당은 사라지고 별 얘기 없이 무덤덤하게 살아간다. 기껏해야 서로의 비자금 얘기에 관심을 갖는다.
 
퇴직한 지 1년이 되어 가는 요즘 왜 은퇴한 남편들이 집에서 세끼를 챙겨 먹는 ‘삼식이’로 불리는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연애 시절 마냥 최소한의 밀당을 이어갔다면 부부간에 대화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얘깃거리가 사라진 부부 사이에선 아내에겐 남편이 밥 끼니 수로 붙이는 별명의 대상 정도의 관계만 남은 것이다. 옛말엔 남편은 바깥양반, 부인을 안주인이라고 불렀다. 밖의 일 전문인 바깥양반이 은퇴해 집에 돌아와 있다고 하자. 평생 퇴직이 없는 안주인 입장에선 식사를 비롯해 신경 쓰이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여기에 바깥양반이 평소에 회사에서 했던 관리 기능까지 발휘하면 삼식이 분류에 들어가기 십상이다.
 
필자는 퇴직 후 본격적으로 남자의 밀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밀당은 상대방에게 눈치를 주고, 그 눈치를 알아채고 반응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안주인 산하에 들어선 지금 적절히 알아서 밀당을 하자는 거다. 식사 때도 마찬가지다. 밥 다 차려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식탁에 앉지 말고, 물을 따르거나 수저를 놓는 등 사소한 도움이라도 주면서 아내에게 말을 걸자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이어 가다 보면 서로의 속내도 헤아릴 수 있고 이야기도 길게 이어질 수 있다. 남편들의 문제는 길게 가는 대화가 없고 단답형으로 끝난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자들은 짧은 이야기도 길게 풀어내는 재주가 있다. 조금만 먼저 남편이 대화의 물꼬를 터 주면 충분히 길게 대화할 수 있다. 아무리 쥐어짜도 얘기가 떠오르지 않으면 커피 한 잔 타서 아내에게 건네주기만 해도 된다.
 
며칠 전 식사자리에서 맞벌이 부부에게 재미난 얘기를 들었다. 남편이 늦게 퇴근한 아내가 걱정돼 마중 나갔다가 오히려 핀잔을 들었다는 내용이다. 마중 나올 시간에 차라리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를 해 놓았으면 더 좋지 않았겠냐는 것이다. 아내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한 번 정도라도 실천하는 것도 중장년에 새롭게 시작하는 좋은 밀당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컴퓨터 전문가인 친구의 충고를 마음에 새긴다. 컴퓨터는 더 이상 업그레이드가 안 되면 바꾸거나 버려야 한다. 우리 역시 최신형으로 바꿀 수는 없다 해도 어느 정도 쓸 만큼 업그레이드만 되면 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주변에서 고위직에 계셨던 분들이 사회복귀 프로그램으로 전철 타기, 은행에서 돈 찾을 때 먼저 번호표 뽑기 등을 배운다는 소식에 한참 웃은 기억이 난다. 옛말에 눈치가 있으면 절에 가서도 고기를 얻어 먹는다고 했다. 황혼엔 밀당도 잘하고 볼 일이다.
 
 
안규문
전 밀레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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