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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떠오르는 발칸반도 여정

중앙선데이 2017.09.10 01:00 548호 29면 지면보기
공감 共感
가을바람이 유독 고맙게 느껴지는 요즘 ‘고전영화분석’ 수업을 준비하며 영화들을 다시 본다. 그중에서도 ‘율리시스의 시선’(1995, 테오 앙겔로풀로스)은 유독 새롭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강대국 사이 통행로처럼 놓인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위치가 주인공이 떠도는 발칸반도와 오버랩되면서 나 자신과 이곳을 돌아보게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1995년 제작된 '율리시스의 시선'
발칸 전쟁에 휩싸여 사라진 필름
주인공이 찾아나선 여정 그린 영화
발칸·한반도에 평화의 의미 전달

‘율리시스의 시선’은 1895년 탄생한 영화 100주년을 기념하는 1995년에 완성된 작품이자 감독 자신의 자전적 고백을 담고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주인공이 최초의 그리스 영화를 찾아 나서는 몽환적 이미지 미학과 영화사적 의미에만 집중했던 것 같다. 그런데 2017년 9월, ‘북핵’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뉴스 핵심어로 뜨는 일상 속에서 이 작품은 한반도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발칸반도의 한 세기 역사보기로 다가온다.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의 변화를 발견하게 해 주는 고전 텍스트의 힘을 체험하는 순간이다. 발카나이즈(balkanize)란 영어 단어는 ‘(서로 적대시하는) 여러 작은 지역으로 분열시킨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발칸반도 지도의 변화를 보노라니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우리의 상황을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도나우강은 발칸반도의 북쪽 경계다. 이 강을 노래한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도 우리에게 친숙한 곡이다. 동유럽풍 애수가 깃든 왈츠풍의 이 곡은 ‘사의 찬미’의 원곡이다. 당대 허무주의 상징기호처럼 알려진 이 노래가 출반된 1926년은 민중정서의 상징인 영화 ‘아리랑’이 나온 해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리랑’도 발칸반도에서 사라진 최초의 영화처럼 그 필름이 여전히 실종 중이다. 이렇게 한반도와 발칸반도 사이의 문화적 유사점이 하나둘 떠오르다 보다 친근한 느낌이 든다.
 
그런 파장을 타고 이 영화를 나침판 삼아 발칸반도 여정에 참여해 보자. 독재정권에 검열당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그리스 감독 A(하비 케이틀)는 35년 만에 귀향한다. 겉으로는 자신의 작품 상영회가 목적이지만, 실제로는 1905년 최초의 그리스 영화인 마나키아 형제의 실종된 필름 깡통 세 개를 찾기 위한 여정이다. 여성들의 베짜는 풍경이 담긴 최초의 이 영화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발칸반도의 일상적 풍경을 보여 주는 소중한 기록물이다. 그런데 발칸 전쟁에 휩싸여 검열당하고 사라진 필름을 찾아 가는 여정, 그것은 A감독의 상실된 자아 탐구행으로 보인다.
 
필름 보관소와 기자 친구들, 여러 곳을 탐문하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길은 그리스 데살로니카에서 출발해 알바니아 국경을 넘어 스코페, 불가리아의 필리포폴리스로 넘어간다. 그러나 필리포폴리스가 행선지라고 답하는 그에게, 경비대원은 그곳은 플로브디프라고 지명을 거듭 고쳐준다. 권력의 판도, 국경의 변화가 지역 이름도 변화시킨 것이다. 그의 여정은 루마니아의 부쿠레시티,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로 연결된다. 그런 여정 속에 의미심장한 시대적 풍경화도 등장한다. 분절된 레닌 동상이 배에 실려 강물을 타고 독일 수집가에게 팔려 가는 광경이 그렇다. 강변을 걸어가다 그 모습을 본 어떤 이는 성호를 긋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멍하게 쳐다보며 황망해 한다. 이렇게 필름을 찾아 나선 길은 발칸반도 남쪽에서 동서를 오가며 북쪽에 있는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로 연결된다.
 
‘사라진 시선의 수집가’란 별칭으로 불리는 이보 레비가 그 필름을 사라예보에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A감독의 강렬한 요청에 감동받아 너무 낡아 포기했던 그 필름을 새로운 방식으로 현상하는 작업에 성공한다. 관객에겐 안 보여 주지만 젖은 상태로 이미지를 본 A감독과 이보 레비는 눈물의 포옹을 나눈다. 그러나 상영용 필름이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마침 그때 안개가 스며든다. 안개 낀 날은 축제의 날이다. 저격수들은 시야가 막혀 총구를 거두고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무슬림 등 다인종 다종교가 어우러져 광장 콘서트를 열며 왈츠를 춘다. A감독도 안개 속에서 춤추며 다가올 필름 공개에 가슴을 설렌다. A감독의 욕망은 좌절되지만, 곳곳에 스며든 심미적 이미지들은 한반도와 발칸반도를 가로지르며 평화의 의미를 전해 준다. 특히 엘레니 카라인드루의 음악은 이미지의 여운과 깊이를 유려하게 청각적으로 생성해낸다.
 
 
유지나
동국대 교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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