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澶淵之盟 <전연지맹>

중앙선데이 2017.09.10 01:00 548호 29면 지면보기
漢字, 세상을 말하다
1004년 송(宋) 진종(眞宗)은 연호를 경덕(景德)으로 바꿔 국정 전환을 꾀했다. 정월 11일 북방 거란(契丹)이 침공을 도모한다는 첩보가 전해졌다. 봄이 오자 화북에는 지진이, 여름에는 메뚜기 떼가 휩쓸었다. 가을이 오자 거란 대군이 남하했다. 황태후와 황제의 친정(親征)이었다. 송은 재상 구준(寇准)이 진종을 수행해 황허(黃河)로 나가 적을 맞았다.
 
송과 거란의 대군은 11월 지금의 허난(河南)성 푸양(濮陽)시의 옛 지명인 전연(澶淵)에서 대치를 시작했다. 거란군 지휘관이 송 복병의 화살에 숨졌다. 거란군은 사기가 떨어졌다.  
 
전쟁보다 화의를 원했던 구준이 나섰다. 협상의 쟁점은 거란에 보낼 재물의 규모였다. 진종은 특사 조이용(曹利用)에게 “화의(和議)만 맺는다면 100만 냥도 좋다”고 했다. 구준은 “30만 냥을 넘긴다면 참하겠다”고 위협했다. 조이용이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 총 30만 냥에 화의를 맺는 데 성공했다. 진종은 거액의 상금을 하사했다.
 
거란은 군사를 거뒀다. 양군 지휘관이 교섭으로 전쟁을 해결할 지혜와 철병의 용기를 갖췄기 때문이었다. 화친 조약문은 서로 ‘대거란국’, ‘대송국’으로 칭했다.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었다. 30만 냥은 무상 경제원조라 불렀다. 평화를 산 대가였다. 화친은 120년간 이어졌다. 재상 구준의 덕이다. 진종이 도피했다면 송은 120년 일찍 화북을 잃었을 것이다.
 
‘전연에서 맺은 화친 맹약(澶淵之盟)’의 찬반은 지금도 분분하다. 일본의 한 학자는 ‘전연지맹’ 이후 양국 무역으로 송은 거란에 매년 80만 냥의 무역 흑자를 거뒀다고 실증했다.
 
6차 핵실험으로 북한이 사실상 핵 보유국에 근접했다. 어느 날 갑자기 ‘전연지맹’이 재연될지도 모른다. “이적을 대하는 방법은 외정(外征)에 있지 않고 내치(內治)에 있다(待夷狄之道 不在乎外攘 而在乎內修).” 조선시대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서문이다. 역사는 줄곧 반복된다.
 
 
신경진
베이징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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