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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수, 슬픈 순수

중앙선데이 2017.09.10 00:02 548호 26면 지면보기
[CRITICISM] ‘사라’만 기억하는 세상, 사라진 ‘차가운 감자’
그리움과 미안함으로
지난 목요일 아침, 마광수 교수의 영결식이 있었다. 스스로 슬픔의 강물에 젖어버린 한 영혼을 향해, 너무도 드릴 말씀이 많고 또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나는 그저 그곳에서는 외롭지 마시고, 힘들지 마시고, 부디 아프지 마시고, 자유롭게 글 쓰시고 그림 그리시고 사시길 바라는 마음만 또렷할 뿐이었다.

정신분석·동양철학·한의학·상징론
그의 문학 규율하는 기제들 다양

시에 천착한 대표적 윤동주 연구자
직접 발화 형식으로 관능·낭만 표현
성적 담론 반복해 피로감 보이기도

장미여관·사라의 단색 이미지 탓
인생론적, 사회 비평적 안목에
비평계는 냉담과 침묵으로 일관

 
하지만 선생을 생각할 때마다 그 많은 인생 굴곡을 떠올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지금 우리보다 까마득하게 젊으셨던 시절 스승으로 오셨을 때, 연세대학교 인문관 2층 연구실은 우리의 상담소요 휴식처요 세미나 룸이기도 했다. 그곳은 선생의 탄탄했던 논문들이 생성된 곳이요, 한 많은 여인 ‘사라’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선생을 많이 사랑했고, 많이 안타까워했고, 때로는 짐짓 멀리했고, 선생의 말년을 그리도 고독하게 두기도 했다.
 
저마다의 기억의 용량과 밀도가 다르겠지만, 많은 이들에게 선생은 그렇게 고유한 빛이자 빚으로 남아계실 것 같다. 어쨌든 선생은 천하의 명강사였고, 유머와 페이소스를 섞어 명언들을 많이 남겼다. 선생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던 학생들도 선생의 사고방식과 자유로움 그리고 해박한 섭렵과 표현에는 고개를 숙였던 것을 기억한다. 빈소가 그다지 초라하지 않았던 것은, 그분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이 모두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명복이라는 것이 있다면, 선생께서 많이 누리시길, 마음 깊이, 빌어본다.
 
 
시의 ‘바깥’에 있었던 시
마광수 문학을 구성하는 인자(因子)는 생각 밖으로 중층적이다. 정신분석, 동양철학, 한방의학, 상징론, 카타르시스 등 그의 문학을 규율하는 사상이나 방법의 기제들이 퍽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과 방법을 통해 그동안 그는 시, 소설, 에세이, 작가론, 문학 이론, 문화 비평 등 다양한 논리적, 미학적 발화를 계속해왔다. 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깊은 그의 문학적 수원(水源)은 ‘시’였을 것이다. 그는 시를 통해 문단에 나왔고, 시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대학에서도 줄곧 시를 강의해왔고, 시집 『광마집』(1980), 『귀골』(1985), 『가자 장미여관으로』(1989), 『사랑의 슬픔』(1997) 등을 통해 자기 각인을 해왔던 터였다. 그래서 마광수 앞에 붙는 여러 에피셋 가운데, 우리는 ‘시인 마광수’를 그의 문학적 원천으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그가 현실적 삶의 변화를 지향하는 리얼리스트의 입장에서 시를 쓴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꿈이 없는 현실은 무의미하고, 꿈과 환상이야말로 현실의 억압 기제를 상상적으로 해소하고 새로운 현실을 개진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시적 언어들은 한결같이 꿈을 통한 ‘상상적 현실’로 변화한다. 그 ‘상상적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바로 관능적 사랑, 유미주의적 쾌락, 페티시즘, 낭만적 허무 등이었다. 이러한 다양한 욕망들을 그는 ‘시’라는 상상적 질서를 통해 대리 배설함으로써, 일종의 카타르시스적 욕망을 추구하려 했다. 그래서 그의 시는 궁극적으로 ‘꿈’을 통한 즐거운 ‘상상적 놀이’가 되었던 것이다.
 
마광수의 시는 ‘가면을 벗은 솔직성’에 근본적인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 그는 서정시가 가지는 복합적 형상화 방식을 배제한 채 관능과 낭만을 직접 발화의 형식으로 표현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시가 오랫동안 ‘몸(육체)’의 미학을 추구해왔다는 사실에 주목하는데, 이는 근자에 유행 담론으로 부상한 ‘몸’ 시학을 그가 선구적으로 천착해왔다는 것을 증언한다. 그런데 그의 담론은, 서구적 의미에서의 탈근대적 ‘몸’ 담론과는 달리, 정리겸고(情理兼顧)를 이상으로 하는 문학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는 카타르시스의 실제적 효용이라는 마광수 고유의 문학론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이때 그가 추구하는 상징적 다원성은 다의적 모호함을 통해 진리를 계시하는 ‘상징’의 속성에 크게 빚지고 있다. 상징을 통해 전근대적인 유형무형의 이데올로기적 집착과 중세적 봉건 윤리에 탄력과 융통성을 불어넣으려는 것이 그의 시학적 욕망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카타르시스를 예술적 효용의 최상 가치로 보았는데, 그것이 심미적 차원이 아니라 실용적 차원에서 추구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물론 이러한 발화 방식은, 그의 시로 하여금 계몽을 반대하는 역(逆)계몽의 양식을 취하게 하는 특성을 지닌다.
 
하지만 마광수의 시는 시의 ‘바깥’에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 숨겨진 ‘안쪽’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바깥/안쪽’에서 마광수의 심층적 욕망과 언어는 풍요롭고도 자유로운 접점을 형성하면서 시적 몽상의 공간을 확장하였다. 비록 그가 추구해온 성적 담론들이 지속적 반복으로 인해 짙은 피로감을 보였던 면도 없지 않지만, 메타적 차원에서 볼 때 그가 보여준 시적 몽상의 지속성과 가능성은 우리 시사의 낯설고도 이질적인 층위로 기억될 것이다. 그 결실이, 굴곡 많았던 그의 삶에, 시인으로서의 그의 남다른 자의식에, 커다란 위로와 회복의 언어가 되어 오래 남아주기를, 정말이지, 바란다.
 
 
그에 대한 평판, 폐쇄회로에 갇혀
마광수를 둘러싼 이미지는 모노크롬(monochrome)에 가깝다. 그것은 그에 관한 평판들이 대부분 ‘야한 여자’나 ‘장미여관’, ‘사라’ 등 작품 표제들로 상징되는 폐쇄 회로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설 『즐거운 사라』(1992) 필화 사건이나, 그로 인한 이러저러한 저널리즘적 반응들은 이러한 단색 이미지를 착근시킨 데 결정적 계기를 부여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마광수 문학은 낱낱 작품들에 대한 정밀한 경험적 독서보다는 이러한 선험적 이미지들의 단순 재생산을 통해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고정관념이 굳어져가고 있는 한편, 또 한켠의 엄연한 그의 몫이 있음을 잘 아는 이 역시 적지는 않았다. 가령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1991)나 『운명』(1995) 등에 나타난 인생론적, 사회 비평적 안목이라든가, 『상징시학』(1985)이나 『마광수문학론집』(1987),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1997) 등에 반영된 독자적인 연구자적 개성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가 한국 학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윤동주 연구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 또한 숨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이 다양한 지적 편력을 보인 연구자에게 쏟아진 비평적 언어는 참으로 미미하기 짝이 없다. 어쩌다 간혹 있는 그에 관한 논의 역시 합리적 논리를 근간으로 하는 ‘비평적 언어’라기보다는 논리적 여과를 거치지 않은 감성적 언어만이 무성할 뿐이다. 이처럼 다른 이들에 비해 왕성하다 못해 정력적으로 활동해온 그의 문필 활동은 사실 엄정한 의미에서의 비평적 검토나 평가의 반열에 들지 못했다. 마광수는 그만큼 학계와 비평계에서 언필칭 ‘차가운 감자’이다. 왜 ‘차가울’ 수밖에 없을까? 이처럼 모두가 합의한 듯한 일관된 냉담과 침묵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그에 관한 변변한 작가론 하나 없는 것 같은 일관된 무반응과 홀대가 그의 학문적 영역에 대한 평가절하로 등치되는 데 대해서는 수긍하기 어렵다. 그가 가지고 있는 함량과 확장 가능성에 비해 그러한 차가움이 부당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영혼이 가볍게 날아오르기를
우리가 마광수 문학에서 만나는 가장 인상적인 긍정적 덕목은 그의 문장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여 깨알 같은 글씨로 원고지를 채워나갔다. 또한 그의 글은 아카데미즘이 불변의 약호처럼 동의해왔던 개념어 더미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다. 물론 학술적 내용의 책에서 개념어를 삼가는 것 자체가 상찬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일관된 문장관은 일단 비문이 없어야 하며, 불가해한 개념으로 치장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에 있었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경쾌하고 정확하다. 이것이 경박하다는 혐의와 등가를 이루지는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알기 쉽고 충분히 좋은 의미로 대중화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마광수 문학에서 또 중요한 것은, 탐미적 상상을 통해 인간 욕망을 순치하고 나아가 건강한 생활로 이월해가는 실제적 효용론에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문학에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담론의 이론적 심화를 더 밀어가지 못하고 일종의 동어반복에 머무른 한계 같은 것일 터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에 관한 일방적 치지도외를 벗고 그의 문학적 성취와 가능성과 한계에 합당한 비평이 하나둘씩 고개를 내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인격적으로 친절하고 자상했던, 하지만 누구보다도 심약하고 외로웠던 슬픈 순수의 영혼이, 오랜 병고와 환멸을 벗고 가볍게 날아오르기를 빌면서 말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문학평론가. 연세대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고 팔봉비평문학상, 김환태평론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비평집으로 『침묵의 파문』과 연구서 『다형 김현승시 연구』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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