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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가 서구 지성 발전에 큰 역할, ‘종교의 자유’ 가치 칭기즈칸서 유래

중앙선데이 2017.09.10 00:02 548호 8면 지면보기
[김환영의 지식 톡톡톡] 몽골이 아끼는 칭기즈칸 전문가 잭 웨더퍼드
칭기즈칸(1162년께~1227년, 재위 1206~27)은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다. 위대한 정복자이지만, 그에겐 ‘학살자’ 이미지도 있다. 문화인류학자인 잭 웨더퍼드 매켈리스터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칭기즈칸은 평등, 신앙의 자유, 관용, 다문화주의 같은 보편가치를 가장 먼저 실천한 역사적 인물이다. 웨더퍼드 교수는 세계적인 칭기즈칸 전문가다. 2007년 몽골 최고 훈장을 받았다. 몽골 정부는 2012년 칭기즈칸 탄생 850주년을 맞아 전국적으로 행사를 거행했는데 전국의 신성한 장소에서 웨더퍼드 교수가 지은 책을 녹음한 것을 틀었다. 그의 칭기즈칸 연구 저작은 세계 20개국 언어로 번역됐다.

거의 모든 종교 유용하다고 판단
며느리-기독교인, 행정-무슬림 선호

도교에 심취하고 유학자는 멀리해
개인 권리 인정한 ‘근대적 사상가’

독립전쟁 벌이던 미국 사람들
유럽 바깥의 영웅 발견하고 열광

정복한 나라 중 고려 가장 존경
왕실과 결혼하는 것 오히려 장려

고려 때 ‘사위국’이었던 한국
이젠 몽골의 형 역할에 관심을

 
최근 웨더퍼드 교수의 『칭기스칸,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꿈꾸다』가 우리말로 출간됐다. 이 책은 종교의 자유가 포함된 미국 수정 헌법 제1조의 뿌리가 칭기즈칸이라고 주장한다. 의외의 연결고리가 있었다. 페티 드라크루아가 쓴 칭기즈칸 전기(1710)는 18세기 식민지 시대 미국의 초대형 베스트셀러였다. 조지 워싱턴,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건국의 아버지’들도 이 책의 애독자였다. 칭기즈칸이 오늘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 웨더퍼드 교수를 e메일로 인터뷰했다.

 
당신은 칭기즈칸이 종교개혁·르네상스·미국혁명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통념과 달라 믿기 힘들다. 어떻게 독자들을 설득할 것인가.
“많은 학자조차 아시아가 서구의 경제적·정치적·지성적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 목표는 서구 가치의 핵심이 아시아에서 유래했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독자들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연구를 통해 진정으로 믿게 된 것들을 제시할 뿐이다.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기겠다. 내 결론에 동의할 수도, 나와 다른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칭기즈칸은 무엇을 믿었나. 샤머니즘? 애니미즘? 하늘?
“아홉 살 정도 됐을 때 그의 식구들은 씨족으로부터 추방됐다. 조상을 섬기는 씨족 제사(祭祀)에 참가할 수 없게 된 칭기즈칸은 자신만의 영적인 행로를 스스로 발견해야 했다. 젊었을 때 칭기즈칸은 그가 살던 곳의 산신(山神)을 믿었다. 나이가 좀 들어서는 ‘어머니 지신(地神)’과 ‘아버지 천신(天神)’을 믿었다. 지도자가 된 후에는 무당들을 활용하면서도 그들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 무당들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말년에는 법치를 하늘(天·Heaven)의 뜻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종교에 대한 그의 관점은 계속 변했다. 칭기즈칸은 매우 복잡한 인물이었다.”  
 
칭기즈칸이 자신이 믿는 종교를 제도화했다면 그가 남긴 제국이 더 오래가지 않았을까.
“칭기즈칸이 바란 것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강한 법으로 통치되는 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는 종교마다 선(善)을 향한 고유의 길을 제시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종교는 본래의 도(道)에서 벗어나 사람을 해칠 수도 있기 때문에 정부가 규제해야 한다고 봤다. 그에게는 법이 모든 종교 위에 놓였다. 그래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법체제에 집중하는 것이었지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는 게 아니었다.”  
 
기독교·불교·이슬람 등 당시 몽골제국 종교에 대한 칭기즈칸의 관점은.
“그는 거의 모든 종교가 유용하다고 판단했다. 며느리로는 기독교인을 선호했다. 손주들의 교육을 위해서였다. 기독교 여성이 아이들을 잘 키운다고 봤다. 행정에는 무슬림을 발탁했다. 숫자에 밝았기 때문이다. 그의 손자들은 고려 승려들의 궁술, 소림사 승려들의 무술 등 불교 승려들의 뛰어난 전투 능력에 주목했다. 한때 도교에 심취해 도교에 특혜를 베풀었다. 결국엔 지신(地神)과 천신(天神)만 믿었다. 칭기즈칸이 유일하게 이해할 수 없었던 종교는 유교였다. 유교에서 그 어떤 가치도 발견하지 못한 그는, 유교 훈련을 받은 관리들을 존중하지 않았다. 그의 결론은 간단했다. 만약 유학자들이 나라를 다스릴 줄 알았다면 몽골이 그토록 쉽게 중국을 정복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칭기즈칸은 어떻게 종교를 활용했는가.
“무엇보다 그는 실용주의적인 행동가였다. 모든 종교에 쓸모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정복 활동을 할 때에는 그의 모든 적들이 종교 간, 종파 간 갈등으로 내부적으로 분열됐다는 점을 파악했다. 적들의 종교 분열을 이용해 내 편을 만들었다. 힘으로만 제국을 건설하고 다스릴 수는 없었다. 10만에 불과한 병력으로 백만 대군을 굴복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적들 내부의 종족·언어·종교 갈등을 파고 들었기 때문이다. 평화 시기에도 종교를 이용했다. 종교 간 갈등을 부추겨 종교 간 세력균형과 조화를 유지했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기미가 있는 정치 지도자들은 죽였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후원했다. 백성의 생각과 행동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왕들이 아니라 사제들이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폭력으로 제국을 건설한 후에는 종교를 후원했다는 점에서 칭기즈칸과 가장 비슷한 역사적 인물은 인도 최초의 통일 왕국을 세운 아소카왕(재위 기원전 268~232년)인가.
“아소카왕의 경우엔 모든 종교를 후원했지만 불교를 선호했다. 페르시아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2세(기원전 590년께~529년께)는 모든 종교에 자유를 주고 모든 종교를 후원했다. 칭기즈칸은 종교의 자유에 대한 관념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그는 자유가 종교가 아니라 개인에게 귀속된다고 인식했다. 각 개인은 자신이 믿을 종교를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심지어는 여러 개의 종교를 한꺼번에 믿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그 누구도 타인에게 종교를 믿거나 믿지 못하게 강요할 수 없다고 봤다. 이러한 개인의 권리에 대한 강조로 보면 칭기즈칸은 이전의 통치자들과 다른 매우 ‘근대적인 사상가’였다.”
 
정교분리(政敎分離)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이었나.
“칭기즈칸에게 정치는 종교와 분리될 수 없었다. 그는 하늘이 궁극적인 권력을 부여하는 대상은 사제나 승려가 아니라 통치자라고 가르쳤다.”  
 
식민지 시대 미국에서 칭기즈칸이 그토록 인기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미국인들은 무의식적으로라도 제국 건설이 꿈이었나.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분투하던 미국 사람들은 유럽 바깥에서 영웅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칭기즈칸을 발견했다. 그렇지만 당시 사람들은 미국이 몽골제국 같은 세계적인 제국을 언젠가 건설할 것이라는 관념이 없었다. 미국인들이 칭기즈칸으로부터 의식적으로 베낀 것은 개인의 종교적 자유다.”
 
몽골제국과 고려의 관계에서 어떤 특이점이 발견되는가.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은 힘든 싸움을 벌였지만, 이내 몽골과 고려 사이에 특별한 커넥션이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몽골인들은 중국인 등 다른 종족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고려 왕실과 결혼하는 것은 오히려 장려했다. 몽골 사람들은 제지술, 조선술, 항해술, 도자기 제조법과 같은 고려인들의 능력에 크게 감탄했다. 몽골인들은 자신들이 복속시킨 그 어느 나라보다 더 고려를 존경했다.”
 
칭기즈칸이 유럽과 미국에 남긴 유산이 관용의 정신이라면, 아시아에 남긴 것은 무엇인가.
“몽골제국의 가장 큰 기여는 아시아의 지도를 바꿔 놓은 것이다. 그들은 여러 왕국으로 분열된 중국을 통일했다. 러시아에 미친 영향도 마찬가지다. 몽골인들이 일본을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몽골의 위협은 일본으로 하여금 단일 민족국가를 향한 길로 이끌었다. 또한 몽골 시대는 고려 사람들로 하여금 민족적·문화적·언어적 정체성을 보다 깊이 의식하게 만들었다. 몽골시대 고려인들은 강대국들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능력을 한층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결코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스스로에게 필요한 것을 외부로부터 들여와 흡수하는 능력 말이다.”
 
칭기즈칸은 야만과 문명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모든 시대는 야만과 문명의 혼합물이다. 문명이 성장하고 더 강대해지면 필연적으로 보다 야만적으로 변한다. 문명화된 독일인들이 강제수용소를 만들었다. 그 어떤 야만인보다 악독한 학살자가 됐다. 일본은 칭기즈칸보다 훨씬 끔찍한 야만성을 분출했다. 미국은 원주민을 학살하고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삼았으며 일본인 민간인을 타깃으로 원자폭탄을 떨어트렸다. 우리는 야만인들을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우리 내부의 야만적인 본성이 튀어나온다. 소위 ‘야만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들에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에 칭기즈칸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제국이나 위대한 나라는 비전을 가지고 건국된다. 시간이 흐르면 비전이 뿌옇게 되었다가 결국에는 사라진다. 칭기즈칸의 후예들 또한 비전을 상실했다. 그저 바라는 게 재물과 권력을 누리는 것이었다. 칭기즈칸의 제국은 결국 붕괴했다. 칭기즈칸은 정치적인 이념이나 종교에 휘둘리지 않는 실용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문제들을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평화로운 통합된 세계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오늘날 정치지도자·종교지도자들은 이념으로 넘친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비전을 제시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우리는 150여 년간 민족들과 종교들이 평화를 유지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시대를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왜 오늘날에는 그런 평화를 달성할 수 없는지 묻기 위해서다.”
 
한국 독자들에게 강조할 게 있다면.
“몽골제국 시대에 왕실 간 결혼 때문에 고려는 ‘사위의 나라’로 불렸다. 이제 한국은 몽골에 ‘형(兄)’이 됐다. 오늘날 몽골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성공시킨 한국을 본보기로 삼고 있다. 그들은 한국 TV프로·음식·음악·대중문화를 즐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나라 중 하나가 됐다. 한국은 몽골인의 의식에서 큰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한국에서 몽골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가 희망하는 것은 앞으로 한국인들이 한국과 몽골 사이의 역사적 고리와, 한국이 몽골의 ‘형’으로서 해야 할 일에 대해 보다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에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아주 많다.”
 
 
김환영 논설위원 kim.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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