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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탈원전 공론화엔 '숙의 여론조사'가 제격

중앙일보 2017.09.09 02:28 종합 29면 지면보기
제임스 피시킨 스탠퍼드대 커뮤니케이션학과 석좌교수

제임스 피시킨 스탠퍼드대 커뮤니케이션학과 석좌교수

한국 정부는 신고리 5, 6호기 공사 중단을 할 것인지 힘든 결정을 내리기 전에 공론화 과정을 거치기로 했다. 여론을 청취하겠다는 한국 정부는 칭찬받을 만하다. 신고리 원전의 기술적 문제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가치의 문제가 개입하는, 논란을 부르는 정치적 결정이다. 만약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기술 관료가 스스로 결정을 내린다면 그들은 누구의 가치를 중시할 것인가. 한국과 같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관료들은 공론을 무시할 수 없다. 사람들의 의견을 묻는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원전은 기술적 문제임과 동시에
가치 개입되는 정치적인 문제
충분히 학습·토론하고 실시하는
‘숙의 여론조사’가 적절한 방법

의견을 묻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조사기관이 선정한 사람들로 구성된 회합이나 온라인 포럼은 대표성 있는 반응을 얻기 힘들다. 의견이 확고한 사람들이나 이해당사자들이 의견을 강하게 표출할 가능성이 있다. 무작위 표본에 의한 통상적 여론조사를 한다면 TV 방송이나 신문 기사 제목에 나올 법한 결론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수많은 사회과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은 정책 문제에 대해 ‘합리적으로 무지’하다. 왜 그럴까. 만약 원전에 대해 국민투표가 실시된다면 내가 던질 표는 수백만~수천만 표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복잡한 원전 찬반 의견을 알아보기 위해 나는 과연 많은 시간을 투자할 것인가. 내 표는 다른 수백만~수천만 표 사이에 파묻힐 것이기 때문에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 일이나 가족 문제에 집중하는 게 보다 합리적이다.
 
통상적인 여론조사 결과는 대체로 천편일률적인 의견을 측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 여론을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내가 별로 생각해보지 못한 이슈에 대한 설문조사에 답해야 한다면 나는 ‘모른다’고 답하지 않고 제시된 답변 중에서 아무거나 찍을 가능성이 있다. 한번은 미국에서 ‘1975년 공공문제법’에 대한 여론조사를 한 적이 있다. ‘공공문제법’이라는 법은 사실 없었다. 가짜였다. 응답자들이 선택한 응답은 ‘유령’ 응답이었다.
 
그래서 나는 ‘숙의(熟議) 여론조사(Deliberative Polling)’라는 기법을 제안한다.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의논한 다음에 여론조사를 실시하는 것이다. 숙의 여론조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 설계됐다. ‘어떤 이슈에 대해 생각할 좋은 여건을 제공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간단한 아이디어다. 어떤 이슈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을 하기 전과 후에 적절한 인구 표본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하면 된다. 숙의 여론조사가 성공하려면 좋은 표본을 확보해야 하고 표본에 포함된 사람들이 그 문제를 진정으로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야 한다. 한국 정부의 계획에 따르면 2만 명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한 후 이 중 500명을 뽑아 토론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원전 이슈에 대한 2만 명과 500명의 핵심 태도와 인구통계자료를 비교할 만한 설문을 고안해야 한다. 숙의 여론조사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면 2만 명과 500명 대상 여론조사 사이에 의미 있는 차이가 별로 없어야 한다.
 
공론화 토론을 위해 필요한 조건도 그리 복잡하지 않다. 각 정책에 대한 찬반 의견을 수록한 참고자료가 제공된다. 참고자료는 공정성과 정확성을 담보하기 위해 전문가 그룹의 심사를 거친다. 표본을 무작위로 12~15명의 소그룹으로 나누고 소그룹 토론을 진행할 사회자를 정해 훈련한다. 소그룹 토론은 전체회의 토론에서 전문가들에게 던질 핵심 질문을 마련한다. 소그룹 토론과 전체회의 토론은 번갈아 개최해야 한다. 전체회의에서 전문가들은 스피치를 하지 않고 오로지 각 소그룹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원전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대표해야 한다.
 
공론화 토론 전후에 포괄적인 설문에 대한 답변 데이터를 수집해야 하며 질적인 분석을 위해 소그룹 토론을 녹음해야 한다. 설문에는 정책 옵션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왜 특정 정책 옵션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지를 설명할 변수가 포함돼야 한다.
 
숙의 여론조사 방식은 나라 전체가 사안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토론할 기회를 준다. 국민·유권자의 의견이 어떻게, 왜 바뀌는지 평가할 수 있게 해준다. 숙의 여론조사는 6대륙, 27개국, 107건 사례에 적용됐다. 미 텍사스의 풍력발전, 일본의 원전 관련 정책 결정, 몽골의 개헌, 마카오의 언론법 결정, 불가리아의 로마학교 차별 철폐 등 다양하고 복잡한 정책 변화에 적용됐다. 숙의 여론조사 방식이 한국에서도 성공적인 결과를 얻기를 기원한다.
 
제임스 피시킨 스탠퍼드대 커뮤니케이션학과 석좌교수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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