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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예술 - 음악] 힘을 뺀다는 것

중앙일보 2017.09.09 02:17 종합 31면 지면보기
정경영 한양대 교수·음악학자

정경영 한양대 교수·음악학자

피아노를 조금이라도 배워본 사람이라면 잘 안다. 힘을 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하농과 체르니, 에튀드(연습곡)를 치면서 수없이 듣는 말은 손목에, 팔뚝에, 어깨에 ‘힘을 빼라’는 것이다. 어디 피아노 치는 일뿐이랴. ‘힘을 빼는 것’은 연주뿐 아니라 무엇인가를 잘하려면 언제나 두루 적용되는 원칙이 아니던가. 그리고 백건우의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 ‘여정’이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지난 1일부터 8일까지 열렸다.
 

백건우의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

애초에 힘을 빼야 가능한 기획이었다.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연주한다는 것은 32개의 곡, 103개의 악장을 연주한다는 뜻이다. 어림잡아 14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7일 동안 여덟 번의 연주회(3일에는 오후 2시·6시 두 번의 연주회를 했고, 4일에는 쉬었다)가 열렸다. 힘을 빼니 그 긴 여정이 가능했다. 힘을 빼니 오히려 상대적으로 힘을 주는 부분이 분명하게 들렸다. 음악의 구조가 명확해지고 베토벤이 의도했던 바가 더욱 선명히 드러났다. 그리고 힘을 빼니 각각의 악장이, 음악회가, 그리고 전체 여덟 번의 연주회 시리즈가 굴곡을 드러내며 음악적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10년 만에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에 나선 피아니스트 백건우. [사진 서울 예술의전당]

10년 만에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에 나선 피아니스트 백건우. [사진 서울 예술의전당]

예컨대 지난 3일 오후 6시 연주회에서 소개한 곡은 베토벤의 소나타 10번, 2번, 22번, 23번이었다. 마지막 곡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도 유명한 ‘열정’이었다. ‘열정’의 마지막 악장 전까지 백건우는 다분히 관조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유려하고 화려한 빠른 패시지들, 상냥하고 섬세한 소리가 능숙한 기술과 힘을 뺀 우아한 무관심, 즉 스프레차투라(sprezzatura) 속에 빛났다. 그리고 마지막 악장이 시작됐다.
 
마지막 악장은 마치 폭풍과도 같았다. 처음부터 휘몰아치는 격렬한 터치는 피아노의 건반뿐 아니라 청중의 귀와 마음까지도 쉴 새 없이 사로잡았다. 이 소나타의 별칭이 왜 ‘열정’인지 손으로, 소리로, 호흡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몰아치는 소리의 감동은, 역설적으로 적절히 힘을 뺀 앞의 연주 때문에 더욱 깊어졌다.
 
‘힘을 뺀다는 것’은 힘이 없는 것과는 다르다. 힘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힘을 비축한다는 것이다. 강조해야 하는 부분이 어딘지 알고 기다린다는 말이며, 우선순위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힘을 빼는 것은 연주의 기본이다. 힘을 빼야 비로소 음악은 음악다워진다. 그러니 힘을 빼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지혜다. 힘을 빼야 삶이 아름다워진다. 백건우의 연주는 음악과 삶의 지혜를 담고 아름답게 빛났다.
 
정경영 한양대 교수·음악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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