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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읽는 영화] 소설 속 살인자는 '반야심경'에 끌렸고 영화 주인공은 니체의 혼돈에 빠졌다

중앙일보 2017.09.09 01:00 종합 25면 지면보기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살인자의 기억법

문학동네
 
“당신이 먹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You are what you eat)”라는 말이 있다. 그동안 먹은 음식들이 모여 당신의 몸을 만든다는 뜻이다. 이는 비단 음식의 중요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마지막 단어만 바꾸면 당신이 ‘읽는(read)’ 것이 바로 당신일 수도 있고, ‘보는(see) 것’이 곧 당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영하 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이와 온전히 부합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소설 속 인물의 필터로 책을 읽으면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는 그는 등장인물이 읽었음 직한 책을 옆에 쌓아놓고 집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2013년 출판된 『살인자의 기억법』도 예외는 아니어서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연쇄살인범 김병수(설경구 분)는 ‘반야심경’을 즐겨 읽고, 살인 과정을 냉철하게 일기로 복기하며, 그 복잡다단한 감정을 오롯이 글로 옮길 수 없어 시를 배운다.
 
김영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의 한 장면. [사진 쇼박스]

김영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의 한 장면. [사진 쇼박스]

그러니 동명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한 원신연 감독의 입장에서 가장 주목해야 했던 것 역시 병수가 읽는 텍스트였을 것이다. 김 작가가 “공(空)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경계도 없네, 그러면 죄도 없겠네”라는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 살인자에게 ‘반야심경’을 읽혔다면, 원 감독은 소설에 등장하는 무수한 텍스트 중 니체에 주목했다. ‘혼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혼돈이 당신을 쳐다본다’는 니체의 말이, 현실에 기반을 둔 기억과 망상을 오가며 뒤엉키는 상황을 가장 적절하게 담았다고 봤다.
 
중심을 잡으니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소설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은 “최대한 소설과 다르게 표현되길 바란다”는 원작자의 지지 하에 마음껏 변형을 가했다. 안면 경련이 시작되면 길을 잃고 기억이 사라지는 병수의 외형적 특징은 ‘구멍이 뚫려 해삼처럼 변해가는 머리’라는 문자를 이미지로 옮기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상상 속 인물처럼 그려진 적대자 태주(김남길 분)와 조력자 안 소장(오달수 분) 등 캐릭터의 창조적 구현은 극을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영화 속 “살인이 시라면 육아는 산문이다”라는 독백은 감독의 손 끝에서 탄생한 명문이다. ‘살인은 시라기보다 산문에 가깝다. 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살인은 생각보다 번다하고 구질구질한 작업’이라는 냉소적 텍스트에 함축성을 부여해 살인을 그만두고 아버지로 전환점을 맞는 순간을 일거에 보여준 것이다.
 
민경원 기자 storymi 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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