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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진시황과 한비자, 두 영웅의 모진 인연

중앙일보 2017.09.09 01:00 종합 26면 지면보기
적우  
양선희 지음, 나남

 
적우(敵友)라는 제목이 눈에 밟힌다. 원수와 친구는 어떤 관계일까.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사이는 어쩌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사이가 됐을까.
 
그런 관계가 있었다. 2250년쯤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직전 진나라의 황제 영정과 한나라의 왕자 한비가 그런 사이였다. 역사는 영정을 진시황으로, 한비는 법가(法家)를 완성한 한비자로 기억한다. 이 두 영웅의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관계가 중국 대륙 최초의 통일왕조를 생산했다.
 
책은 이 두 영웅의 관계, 아니 이 둘의 모진 인연을 추적한 역사소설이다. 지은이가 모두(冒頭)에서 영웅의 일대기를 재현한 전기소설이 아니라 ‘책략소설’이라고 밝혔듯이 소설은 영웅들의 삶을 무용담 모양 꾸미지 않는다. 내가 살려면 남을 죽여야 하는 절체절명의 역사를 오늘 아침 신문기사처럼 생생하게 재현한다.
 
역사가 증언하지 않는 중국 고대사의 일단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역사의 가르침이다. 이를테면 소설 막판 궁지에 몰린 한비자가 ‘성공해도, 실패해도, 가만히 있어도 나는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는 걸 선택할 수는 없다(266쪽)’며 결단을 내리는 대목은 무기력한 현대인이 새겨야 할 경구로 읽힌다.
 
오늘 우리나라의 딱한 처지가 연상되는 구절도 있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중심을 잡지 못하면서도 전략적 모호성이 약소국의 살길임을 설파하며 군신 모두가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합종파에서도 연횡파에서도 양다리 걸치고 뒤통수를 치는 나라로 꼽혀, 한나라는 미운털이 박힌 채 따돌림을 당하는 처지에까지 이르렀다(47쪽).’
 
권모술수나 부린 냉혈한으로 알고 있던 한비자가 소설에서는 번듯한 외모에 고상한 기품을 지닌 지식인으로 등장한다.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새로운 유형의 영웅론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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