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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 50주년 맞는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 총리] 영국사 학자들이 뽑은 최고의 총리

중앙일보 2017.09.09 00:02
외유내강의 평화시기의 리더 스타일...무상의료·연금확대로 복지국가 건설
 
10월 8일이면 서거 50주년을 맞는 클레멘트 애틀리(1883~1967) 전 영국 총리에 대한 추모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BBC방송은 최근 급진적인 발언 때문에 지지자들로부터도 비난을 받고 있는 제리미 코빈 노동당 대표와 애틀리의 차이점을 비교하는 특집 기사를 내보냈다. 애틀리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조화시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정치인이었다. 전 국민에게 무료로 의료복지를 제공하는 전국건강서비스(NHS)를 정착시켰다. 뿐만 아니다. 애틀리는 재정 건전성을 해치지 않고 영국을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요약되는 복지국가로 탈바꿈시켰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외쳐
 
애틀리 총리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리더십으로 전후 영국을 새로운 복지국가로 만들었다.

애틀리 총리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리더십으로 전후 영국을 새로운 복지국가로 만들었다.

잠시 영국 정가의 묵은 농담 하나를 들어보자. 보수당의 윈스턴 처칠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 옆자리에 정적이 오자 황급히 자리를 옮겼다. 정적은 말했다. “화장실에서까지 이럴 필요는 없지 않소.” 처칠이 대답했다. “당신은 큰 것만 보면 국유화를 하려고 하기에….” 여기에 나온 처칠의 정적이 바로 노동당의 애틀리 총리다. 당시 처칠은 야당 당수였다. 애틀리는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부터 한국전쟁 이듬해인 51년까지 총리를 지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구호로 요약되는 20세기 복지국가를 건설한 그의 리더십을 말해주는 또 다른 키워드가 이 일화에 등장하는 국유화다. 복지국가에 필요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그는 석탄·철강 등 전체 산업의 20% 정도를 국유화했다. 이는 나중에 생산성 문제로 정부 재정에 심각한 부담을 줬고 결국 마거릿 대처 총리 시절 대대적인 민영화를 불렀다.
 
애틀리는 처칠과는 성격도, 리더십 스타일도, 정책도 방향이 서로 달랐다. 처칠이 불같은 성격에 열정적인 태도, 그리고 명연설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끌고 가는 ‘전시 지도자’ 스타일이었다. 애틀리는 조용한 성격과 침착한 태도에 수더분한 말로 사람들을 잘 설득하며 밀고 가는 평화시의 리더 스타일이었다. 경제와 복지 등 추구하는 정책도 서로 달랐다. 주요 산업의 국유화는 특히 두 사람이 심하게 대립했던 부분이다.
 
좌파인데도 국익 위해 ‘반소·반공’
 
1945년 7월 17일~8월 2일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 수뇌회담에 참석한 세 거두. 가운데는 트루먼이고, 왼쪽은 총선 패배로 급거 귀국한 처칠을 대신한 애틀리, 오른쪽은 스탈린이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소]

1945년 7월 17일~8월 2일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 수뇌회담에 참석한 세 거두. 가운데는 트루먼이고, 왼쪽은 총선 패배로 급거 귀국한 처칠을 대신한 애틀리, 오른쪽은 스탈린이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소]

두 사람이 죽이 잘 맞는 정책도 있었다. 바로 반공이다. 1935~55년 20년 동안 좌파정당인 노동당 당수를 맡은 애틀리는 국내 정책에선 노동당식의 평등사회를 건설하는 데 치중했다. 하지만 외교에선 확고하게 전통의 친미·반소·반공 정책을 견지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초강대국이 된 미국과 소련이 냉전(1945~91년)에 들어가자 냉정한 판단으로 미국을 편들며 자유진영의 핵심 역할을 했다. 소련이 동유럽에 세력을 확장하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좌파정당인데도 반공·반소·친미 정책을 편 것이다.
 
이념보다 국민과 국가의 이익을 앞세운 판단이다. 애틀리는 이미 2차대전 중 처칠이 주도하는 전시 대연정에 참여해 부총리를 지내는 등 일찍이 국익 중심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처칠이 1945년 7월 포츠담에서 미국의 해리, 소련의 요시프 스탈린, 중국의 장제스와 함께 그때까지 항복하지 않고 있던 일본 처리 문제를 논의하던 중 갑자기 날아온 애틀리를 만난 일은 유명하다. 자신이 총선에서 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처칠은 야당 당수인 애틀리가 새 총리가 됐음을 통보받고 그가 타고 온 비행기를 타고 귀국해야 했다.
 
애틀리의 반소·반공 의식은 확고했다. 1947년 이후 노동당 내 좌파들이 ‘계속 좌향좌(Keep Left)’를 주장하며 미국과 소련 사이의 제3세력으로서 중립정책을 요구했지만 애틀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대신 국민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소련은 물론 영국 공산당과도 멀리했다. 공산당과 가까이하는 노동당원은 가차 없이 제명했다. 국민의 지지 속에 내정 개혁을 완수하려면 공산당이나 소련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국민에게 확신시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영국이 미국과 함께 치른 냉전은 사실 영국 역사상 가장 길고 비용이 많이 들어간 전쟁이었다. 핵무기를 포함한 재무장에 천문학적인 예산이 들어갔다. 포성이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긴장이 떨어진 것도, 총 한 방 쏘지 않는다고 역사적 의미나 가치가 부족한 전쟁도 아니었다. 냉전은 사실 아주 치열하고 위험스러웠지만 애틀리는 용의주도하게 냉전에 대처했다. 우선 1949년 4월 공산권에 대항하는 서방 집단방위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창설에 앞장섰다. 그러면서도 영국이 독자 노선을 걸으려면 핵무기 보유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1947년 1월 자체 핵무기 개발을 지시했다. 애틀리의 핵 자주권 확보 노력은 정권이 바뀐 1952년 남호주에서의 핵실험으로 결실을 맺었다.
 
미국과 친해도 독자노선 대비 핵무장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 행사에서 영국 내 가장 유명한 아동병원인 그레이트 오먼드 스트리트 병원(GOSH)과 무상의료제도인 NHS를 형상화한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애틀리 총리는 전 국민에게 무료로 의료복지를 제공하는 NHS를 정착시켰다.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 행사에서 영국 내 가장 유명한 아동병원인 그레이트 오먼드 스트리트 병원(GOSH)과 무상의료제도인 NHS를 형상화한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애틀리 총리는 전 국민에게 무료로 의료복지를 제공하는 NHS를 정착시켰다.

애틀리의 리더십은 한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데 두 차례 기여했다. 첫째는 앞서 말한 45년 7~8월의 포츠담 회담이다. 전후 한반도의 독립을 재확인한 역사적인 행사다. 회담 초반에 참석했던 처칠은 7월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황급히 귀국했고 새로 총리가 된 애틀리가 영국 대표로 전후 처리 과정에 참여했다. 둘째는 한국전쟁 참전이다. 전쟁이 발발한 한국에 미국에 이어 둘째로 많은 병력인 연인원 8만7000명을 파병해 공산군에 맞서 싸우게 한 것이다. 애틀리는 안경과 틀니 지원비 등 복지예산을 깎아 한국전쟁 전비를 비롯한 냉전을 위한 재무장 비용을 마련했다. 그가 파병한 영국군은 51년 4월 22~25일 파주군 적성면 설마리 일대에서 벌어진 임진강전투(적성전투·설마리전투라고도 함)에서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해 서울이 다시 중공군의 손에 들아가는 것을 막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당시 영국 군인들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한 발의 총알을 다 쏠 때까지 진지를 사수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그 결과 한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서울 북방에 튼튼한 방어선을 구축해 중공군이 다시는 서울을 넘보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애틀리의 리더십 가운데 좋은 평가를 받는 또 다른 것이 세계적인 경제학자 케인스의 활용을 포함한 적재적소의 인사다. 그는 학벌보다 실력을 판단해 인재를 등용했다. 37명의 각료 중 대학 졸업자는 10명에 불과했다. 19명이 노동자나 노동운동가 출신이었으나 2명을 제외하고는 전시내각에서 행정 수업을 했다. 그중 백미가 노동운동가 어네스트 베빈을 외무장관에 발탁한 것이다. 1922~40년 운송노조 위원장과 40~45년 처칠 주도의 전시 대연정 내각에서 노동장관을 지낸 베빈은 경력상 그 자리가 어울리지 않아 보였지만 오랜 노동운동으로 다져진 협상능력과 상대의 의중을 잘 꿰뚫는 스타일로 외교장관 일을 잘 수행했다. 게다가 노동운동 과정에서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공산당과 싸워본 경험 때문에 철저한 반공노선을 유지, 애틀리와 배짱도 맞았다. 결국 애틀리와 임기를 같이했으며 전후와 냉전 초기 영국 외교의 확실한 방향타 역할을 했다.
 
애틀리는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정책 추진력에선 처칠 못지않게 박력이 넘쳤다. 일단 공을 잡으면 곧장 골대로 강하게 밀고 들어가는 스트라이커 스타일로 일을 추진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전후 식민지 독립이다. 제국주의자로 평가받는 처칠은 식민지, 그중에서도 노른자위인 인도의 독립에 회의적이었지만 애틀리는 이를 과감하게 추진했다. 인도는 47년 이후 인도·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 포함)·실론(지금의 스리랑카)으로 나뉘어 독립한 후 모두 영연방에 가입했다. 식민지를 독립시키면서 서로 가까운 친구로 남기는 외교적 성과를 거둔 것이다. 여기에는 애틀리의 용의주도한 리더십이 한몫했다. 그는 마지막 인도 총독에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자인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을 임명하고 독립 협상 전권을 부여했다. 왕실의 권위를 활용해 국내 정계의 반대론을 잠재우고 협상도 순조롭게 풀려는 의도였고, 이는 맞아 떨어졌다. 다만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로 나눠서 독립시키는 문제는 매끄럽게 해결하지 못해 오점을 남겼다.
 
인도·파키스탄 독립시켜 새 시대 열어
 
전후 어려운 경제적 여건 속에서도 영국을 신속하게 복지국가로 만든 것도 애틀리의 리더십에 힘입었다. 애틀리는 45년 5월 VE(유럽에서의 승리) 2개월 뒤에 치러진 총선에서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전쟁에 지친 영국인들은 과거의 영광이나 되새길 것 같은 보수당 대신 ‘미래를 맞이하자 (Let us face the future)’라는 구호 아래 전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자는 노동당을 선택했다.
 
애틀리는 일사천리로 전후사회의 판을 새로 짰다. 그는 복지국가의 실현을 위해 준비된 정책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우선 영국이 지금도 자랑하는 국민건강시스템(NHS)을 집권 이듬해인 1946년에 도입했다. NHS는 세금을 재원으로 전 국민을 무료로 진료해주는 획기적인 정책이다. 의사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개인 개업이 가능하도록 타협함으로써 무마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영국의 자랑거리를 보여주는 공연 도중 간호사와 환자 복장의 수많은 배우와 병상이 무대에 등장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NHS를 소개하는 장면이다.
 
노령보험·실업보험 등 국민보험도 강화해 대부분의 국민이 혜택을 받도록 했다. 51년까지 100만채를 새로 짓고 50만채를 보수하는 주택보급 사업도 펼쳤다. 애틀리는 국민에게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고 요구하는 대신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정부의 모습을 보여줬다. 애틀리 리더십의 핵심으로 평가되는 대목이다.
 
복지재원 마련을 위한 국유화는 초고속으로 진행했다. 1946년 말 잉글랜드 은행을 국유화한 데 이어 생산성이 떨어지고 툭하면 노사분쟁이 일어났던 말썽꾸러기 석탄산업도 국유화했다. 항공·철도·화물차·운하·유무선통신·전기·가스 등 주요 기간산업을 48년까지 차례로 국유화했다. 자본주의가 탄생한 나라에서 이렇게 급속도로 국유화 정책을 폈으니 파장이클 만도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과정을 중시해 국민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했으며 주주들에게는 충분한 보상을 했기 때문이다.
 
과감한 개혁으로 사회를 대대적으로 바꿔놓았음에도 그의 치밀한 리더십 덕분에 충격과 저항은 미미했다. 공공편의시설과 무관한 가스·철강산업을 국유화할 때 보수당이 반발한 정도를 제외하고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했다. 국유화 과정의 진통은 처칠과의 화장실 농담에서나 남아있는 정도다. 국유화로 인한 국력 소모를 막은 애틀리는 계획경제로 수출을 늘리고 세수를 증대시켰으며 노조와 대화해 임금 인상 요구를 억제하며 전후 재건을 주도했다. 2004년 영국사 연구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처칠을 누르고 영국 역대 총리 중 최고의 인물로 평가받기에 충분한 리더십이다.
 
자본주의 탄생 국가에서 급속한 국유화 추진
 
그런 애틀리도 49년 소련의 핵실험과 중국 공산화, 50년의 한국전쟁 발발로 영국민의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면서 좌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인기를 잃어갔다. 보수당은 ‘국민을 풀어주라(Set the people free)’라는 구호로 노동당의 계획경제와 국유화 정책을 비난했다. 결국 51년 10월 총선에서 20만표라는 박빙의 표차로 정권을 넘겨줘야 했다. 선거 불복운동이나 재검표 소동은 아예 없었다. 그는 끝까지 신사로서, 정정당당한 정치인으로서 명예와 품위를 지켰다. 애틀리는 런던의 중산층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나 사립학교와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후 변호사가 됐다. 당시 대학 분위기는 보수 일색이었지만 그는 지역 학교에 자원봉사를 나갔다가 빈민들의 참상을 목격하고는 노동당원이 됐다. 하지만 조용히 자신의 신념을 유지했을 뿐 이념으로 편가르기를 하거나 국민을 분열시키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가 처칠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지도자로 기억에 남은 이유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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