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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세상읽기] 직접민주주의가 미래다

중앙일보 2017.09.06 02:12 종합 32면 지면보기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영국 국민은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자유로운 건 의원을 선출할 때뿐이며 일단 선출이 끝나면 그들은 노예가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들이 짧은 기간에 누리는 자유는 딱 자유를 상실하기 합당할 만큼이다.”
 

정당 실세만 바라보는 의원들의 현실 속 대의제
국회와 국민이 경쟁하며 완성하는 직접민주주의

장 자크 루소다운 시니컬한 비평이다. 이상적인 정치 모델로 일컬어지던 영국 대의제도의 실상을 꼬집은 것이다. 루소는 대의제도의 한계를 일찌감치 내다봤다. 그의 혜안은 오늘날 더 잘 들어맞는다.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그렇다. 우리나라의 대의제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백약이 무효인 임종 상황에 몰렸다.
 
대통령의 입에서 ‘직접민주주의’ 발언이 나온 게 그래서 뜬금없지 않다. “국민이 간접민주주의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 결과 우리 정치가 낙후됐다. 직접 촛불을 들어 정치적 의사 표시를 하고 댓글을 통해 제안하는 직접민주주의를 국민이 요구한다”는 말에 하나도 틀린 게 없다. 물론 거기에는 여소야대를 극복하기 어려운 현실 인식과 소수 의석의 한계를 높은 국민적 지지로 돌파하고자 하는 희망 섞인 의도가 담겼을 터다. 그것을 ‘꼼수’라 쳐도 ‘국회 패싱’이니 ‘대의민주주의 부정’이니 하는 야당의 공격은 아무래도 지나쳐 보인다. 북핵 위기 속 정기국회를 보이콧으로 시작하는 제1야당이 국회 패싱을 운운하는 게 가소롭고, 직접민주주의란 대의민주주의의 부정이 아니라 꼭 필요한 보완책일 따름인 까닭이다.
 
사실 우리의 정치체제를 대의민주주의라 하기 남세스럽다. 국민이 선출한 대표들이 국민 뜻을 대변해 국민 주권이 실현돼야 대의민주주의인 거다. 우리는 그냥 대의제일 뿐이다. 국민대표가 권력자 뜻만 받들어 국정을 농단하고 헌법을 유린하게 고무·방조한 거 아니었던가. 참다못한 국민이 촛불을 켜 들자 ‘앗 뜨거워라’ 대통령을 쫓아내고 다시 대선을 치렀지만 정작 자신들 임기는 3년이나 남았으니 아쉬울 게 없는 이 땅의 국민대표들 아니냔 말이다.
 
“잘못 뽑았다”고 후회한들 이미 늦었고 3년을 기다려 다른 사람을 뽑아봐야 달라질 것도 없다. 정당의 실세가 공천권을 틀어쥐고 국민의 선택권은 이를 추인하느냐 마느냐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런 국회의원이 누구에게 충성할지는 자명한 일이다. ‘친박연대’라는 노골적 이름의 정당이 생겨나고 실세를 거슬러 국민의 뜻을 좇다가 ‘배신자’로 몰려 공천 탈락하는 예를 본 게 먼 과거가 아니다. 그러고도 당 혁신위가 혁신의 일환이라며 버젓이 ‘전략공천’을 내세우는 게 이 나라 정당의 현실이다.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이런 상황에선 입법 절차조차 이권 또는 요식 행위가 된다. 당 지도부 몇몇에 의해 주요 정책과 법률안이 정해진다. 의원들은 국민의 뜻보다는 자신의 이익에 우선하는 법안만 발의한다. 여론 수렴이 끝났고 정부가 오랜 기간 준비해 온 종교인 과세를 유예하자는 법률안이 버젓이 나오는 이유다. 이제 대통령의 말에 일리가 있고 루소의 말은 더더욱 진리임이 명확해졌다. 대안은 직접민주주의다. 몇 가지 오해만 걷으면 된다. 흔히 직접민주주의는 세 가지 이유로 부인된다. 대의제도가 무력화된다는 것과 고대 그리스처럼 도시국가 수준에서나 가능하다는 것, 중우정치(衆愚政治)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 말했지만 직접민주주의는 대의제의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다. 직접민주주의의 성공적 모델인 스위스 역시 법률안의 90%를 국회가 발의한다. 국회가 국민 의사에 반하는 법률을 만들 때 국민투표로 거부할 수 있고 국민이 요구하는 법률을 제정하지 않을 때 국민이 직접 발안할 수 있게 할 뿐이다. 이런 장치가 국회에 더욱 책임감을 부여할 것이다. 국회와 국민이 선의의 경쟁자가 돼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것이다.
 
도시국가 운운하는 것도 시대착오다. 오늘날 유권자가 한자리에 모일 필요는 없다. 한 세기 전까지 상상도 못했던 정보기술(IT)이 온라인 광장과 온라인 투표를 자유롭게 한다. 국민과 경쟁하는 의원이나 정당이라면 최대한의 현안 정보를 제공하며 국민을 설득하려 나설 것이다. 이런 게 바로 정치 개혁이다.
 
중우정치보다 더 무서운 건 민심을 거스르는 정치 엘리트들의 오만정치(傲慢政治)임을 우리는 경험했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직접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예컨대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권을 규정한 헌법 128조 같은 전형적 플레비시트(plebiscite)를 없애야 한다. 유신헌법에서 ‘국민’을 ‘대통령’으로 바꾼 게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대표적인 악법 사례다. 원래의 주인인 국민에게 권한을 돌려줘야 한다.
 
루소가 직접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말한 ‘국민주권’은 참여에 의한 자유 확보로 실현된다. 국민주권의 실현을 위해 직접민주주의가 미래란 말이다.
 
이훈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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