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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 혁명이 계획경제 되살릴까

중앙일보 2017.09.05 11:05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왼쪽)와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30년대 대공황 시대에 불황의 해법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국가 개입(케인스)이냐, 시장 자유(하이에크)냐'를 놓고 겨룬 둘의 논쟁은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살아남아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대공황 시대 일자리를 찾아나선 노동자들의 액자 사진 앞에 두 사람을 배치해 합성한 장면. [사진제공=부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왼쪽)와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30년대 대공황 시대에 불황의 해법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국가 개입(케인스)이냐, 시장 자유(하이에크)냐'를 놓고 겨룬 둘의 논쟁은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살아남아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대공황 시대 일자리를 찾아나선 노동자들의 액자 사진 앞에 두 사람을 배치해 합성한 장면. [사진제공=부키]

"비슷한 실력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서 공놀이 시합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만약 이 사람들의 주의집중 상태, 심장과 폐와 근육의 상태 등 필요한 정보를 속속들이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면 이 시합의 승패를 맞출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정보를 모두 손에 넣을 수는 없으며 경기 결과는 과학적으로 예측 가능한 범위 바깥에 있다."
 

74년 하이에크 "데이터 부족으로 계획경제 불가능"
FT "오늘날 빅데이터 기술로 계획경제 효율 높아져"
마윈 "'보이지 않는 손' 찾아낼 것…계획경제 커진다"
"빅데이터만으론 계획경제 불가능" 전문가 지적도

이상은 신자유주의의 선구자로 꼽히는 영국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면서 발표한 연설문의 일부다. 일생을 계획주의 경제에 맞서 자유주의 경제 원리의 필요성을 주장해 온 하이에크의 주장은 이 예시에 잘 나타나 있다. 간단한 공놀이 시합 결과조차도 예측하지 못하는 인간이 국가 경제를 통제하고 계획하려는 것은 결국 파괴적인 결과만을 낳을 뿐이며, 따라서 최선의 경제 체제는 시장의 원리에 맡기는 자유시장 경제라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복잡한 세계 경제를 예측하는 데 필요한 모든 데이터를 손에 넣을 수도, 계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최근까지는 하이에크의 주장이 맞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빅데이터가 등장하고 컴퓨터와 인공지능(AI)이 발달함에 따라 계획주의 경제의 부활 가능성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다. 4일(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빅데이터 혁명이 계획경제를 되살릴 수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에서 FT는 과거 냉전에서 서구 자본주의가 소련 공산주의에 승리한 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중앙집권형 계획경제보다 데이터 처리에서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었다며 "그러나 현대 사회의 폭발적 데이터 증가로 시장경제와 계획경제 간의 정보 격차가 줄어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불가능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쓰인 중국 상하이의 한 스포츠용품 매장 앞에 노숙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중국은 장쩌민 전 주석이 계획경제 제도를 폐지하고 시장경제를 기본 경제제도로 채택했다. 김경빈 기자

‘불가능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쓰인 중국 상하이의 한 스포츠용품 매장 앞에 노숙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중국은 장쩌민 전 주석이 계획경제 제도를 폐지하고 시장경제를 기본 경제제도로 채택했다. 김경빈 기자

소련에서 경제 계획을 수립하던 관료들은 입수할 수 있는 데이터가 크게 제한됐기 때문에 시장을 예측하고 계획을 세울 수 없었지만 오늘날엔 그런 관료들이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도록 도와주는 도구들이 아주 많아졌다는 것이다. FT는 "(스마트폰, 태블릿 등) 각종 전자기기들이 우리의 경제활동과 수요, 욕구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쏟아내고 있다"며 "이 데이터를 잘 가공하면 수요과 공급이 만나 형성되는 시장의 가격 결정 메커니즘을 그럴 듯하게 흉내낼 수도 있을 정도"라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온라인상을 자유롭게 오가는 데이터들은 관료들의 부패나 비합리적 의사결정, 중앙으로의 권력 집중 등 과거 계획경제의 고질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보완책이 되기도 한다. 획일적인 선택을 강요했던 옛 계획경제와 달리 빅데이터를 통해 개인별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쉬워졌다.
 
FT는 특히 아직 공산주의 이념이 남아 있는 중국에서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기술을 이용해 21세기형 계획경제 체제를 구축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의 마윈(馬雲) 회장은 지난해 한 콘퍼런스에 참석해 "빅데이터가 시장을 더 똑똑하게 만들고 시장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찾아낼 수 있다"며 "이로 인해 마침내 계획경제가 가능해질 것이다. 계획경제는 향후 30년 간 급속도로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마윈 알리바바 그룹 회장이 지난해 7월 6일 중국 항저우 윈시 컨벤션센터에서 상하이자동차와 공동 개발한 세계 최초 양산 스마트카 RX5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마윈 알리바바 그룹 회장이 지난해 7월 6일 중국 항저우 윈시 컨벤션센터에서 상하이자동차와 공동 개발한 세계 최초 양산 스마트카 RX5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시장경제와 계획경제 간의 조화를 모색하는 이론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왕빈빈(王彬彬) 쓰촨대 마르크스학과 교수는 학술지 '세계 정치·경제 리뷰(World Review of Political Economy)' 여름호에 게재한 논문을 통해 "시장이 자원 배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되 플랫폼을 이끄는 주도적 역할은 국가가 맡는" 새로운 경제 모델을 제시했다. 이 논문에서 왕은 "(구글, 아마존 등) 현재 온라인 플랫폼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기업들은 중앙집권형 기관과 흡사하다"며 "그런 독점 플랫폼은 기업 대신 정부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 보다 합법적이며 합리적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각에선 아무리 빅데이터 기술이 발달해도 계획경제가 성공하기는 어렵다는 반론이 나오고 있다. 장웨이잉(張維迎) 베이징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 4월 베이징대에서 한 연설을 통해 "지식과 정보가 기업가들에게 유용하긴 하지만 진정한 기업가 정신은 그런 것들을 초월해 있다"며 "기업가들은 지식과 정보 이면에 있는 것들을 꿰뚫어봐야 한다. 기업가들마다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모두 다르다. 데이터에 기반을 둔 의사결정은 과학적일지 몰라도 기업가적이진 않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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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표 원로 경제학자인 우징롄(吳敬璉) 국무원 발전연구센터 연구원도 지난 4월 한 연설에서 "20세기 초반에도 일부 학자들은 충분한 데이터가 있을 경우 계획경제도 고도로 효율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지만 이후 계획경제 하에선 충분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됐다"며 "지방 정부가 데이터를 보고하는 과정에서 부풀리거나 누락시키는 일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빅데이터만으로 계획경제가 운용되리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고 지적했다.
 
이기준 기자 forideali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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