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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문학상 휩쓴 현대 시의 거장 존 애시베리 별세

중앙일보 2017.09.04 13:54
미국 현대 시의 거장 존 애시버리(90). [미국 시 재단 홈페이지]

미국 현대 시의 거장 존 애시버리(90). [미국 시 재단 홈페이지]

 파격적인 기법으로 현대 시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미국 시인 존 애시베리가 3일(현지시간) 별세했다. 90세. 애시베리의 동성 배우자인 데이비드 커매니는 이날 애시베리가 노환으로 뉴욕주 허드슨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1975년 대표작 『볼록 거울 속의 자화상』
거울 속 일그러진 원근법 통해 기존 인식 구도의 한계 묘사
이듬해 퓰리처상, 전미도서상, 전미비평가협회상 휩쓸어
"지난 50년간 미국 시문학에서 가장 존재감 큰 인물"

애시베리의 시는 난해하기로 유명했다. 애시베리가 종전까지 시의 핵심 가치로 여겨져 왔던 의미, 서정성 등에 의문을 제기하며 일부러 무의미한 단어를 나열하거나 앞뒤로 전혀 다른 내용을 배치하는 등 애초에 해석이 불가능한 시를 썼기 때문이었다.  
 
애시베리는 미술의 콜라주 기법을 차용해 잡지나 신문에서 잘라낸 글귀를 배열해 시를 만들어냈고, 문자의 의미보다 선율과 리듬을 앞세워 음악 같은 시를 썼다. 이는 언어가 현실을 재현하며 의미 전달의 수단이라는 기존 사고방식을 겨냥해 애시베리가 던진 날카로운 물음이었다.
 
애시베리의 참신한 시도는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1975년 출간한 시집 『볼록 거울 속의 자화상』은 이듬해 퓰리처상, 전미도서상, 전미비평가협회상 등 미국의 주요 문학상을 휩쓸며 현대 시의 새로운 거장이 탄생했음을 전 세계에 알렸다.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화가 파르미자니노의 작품인 '볼록 거울 속의 자화상'. (1524, 볼록 판넬에 유채) [위키미디어]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화가 파르미자니노의 작품인 '볼록 거울 속의 자화상'. (1524, 볼록 판넬에 유채) [위키미디어]

애시베리의 대표작 『볼록 거울 속의 자화상』은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화가 파르미자니노가 남긴 동명의 회화 작품을 소재로, 볼록 거울 속에선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의 철칙으로 받아들여지던 원근법조차 여지없이 무너진다는 사실을 통해 기존 인식론적 구도의 한계를 드러내고자 한 작품이다.
 
랭던 해머 예일대 영문과 교수는 2008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지난 50년간 미국 시문학에서 애시버리 만큼 존재감이 큰 인물은 없다"며 "애시버리의 시구는 항상 새롭게 느껴진다. 그의 시는 언어학 양식이 주는 규제에서 벗어나 말의 기쁨과 놀라움을 부각시킨다"고 평했다.
 
애시베리는 1927년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에서 태어났다. 8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고등학교 때 이미 시 분야의 권위지인 포에트리 매거진에 작품을 게재하는 등 시작에 재능을 보였다. 1949년 하버드대를 수석으로 졸업하며 본격적으로 시 쓰기를 생업으로 삼았다. 『볼록 거울 속의 자화상』이후 세계적인 작가로 거듭난 애시베리는 시 문학에 기여한 공로로 프랑스 최고 권위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미국의 국가인문학 메달 등을 수여받는 영예도 누렸다.
 
동성애자였던 애시베리는 1970년 42세의 나이로 당시 23세였던 커마니를 만나 평생을 배우자로 함께했다.
 
이기준 기자 forideali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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