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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의 시시각각] 핵 식민지로는 살 수 없다

중앙일보 2017.09.04 02:03 종합 34면 지면보기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북한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10~20kt급의 핵폭탄 수십 발을 확보한 것으로 추정돼 왔다. 이들 폭탄의 살상력은 전술핵 수준(전략핵은 100kt 이상)인데 얼마 전 일본 상공으로 날린 중거리탄도미사일(IRBM)이나 미국 본토가 사정거리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장착하면 전략핵으로 상승한다. 북한이 어제 완성했다고 발표한 수소탄의 파괴력은 50~200kt이다. 전략핵폭탄과 전략핵무기가 완비된 셈이다. 이제 북한은 미국·중국과 맞짱 뜰 수 있는 전략핵 국가가 되었다고 선전할 것이다.
 

김정은의 최종 먹잇감은 한국
전술핵·핵무장 주장 막지 못해

미·중과 일본이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진짜 문제는 한국이다. 북한이 최종적으로 노리는 먹잇감은 오직 한국이기 때문이다. 핵 무력에 대응할 아무런 수단이 없는 한국은 북한의 핵 식민지가 됐다고 자조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미국이 아무리 확장 억제란 이름의 핵우산을 씌워 주겠다 해도 수천~1만여㎞ 떨어진 괌이나 본토에서 이동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 틈을 타 한국의 급소를 치고 맥을 못 추게 한 뒤 남북관계를 압도적으로 끌고 가겠다는 게 김정은의 한국 지배 전략의 요체다.
 
실제 김정은은 “인민군대에서는 서울을 단숨에 타고 앉아 남반부를 평정해야 한다”고 한 뒤 “전략군에서는 앞으로 태평양을 목표 삼아 탄도로켓 실험을 많이 해서 전략 무력을 실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략군의 핵·미사일로 미국의 핵우산과 전시 증원 전력을 차단한 채 인민군대(재래식군)로 서울을 순식간에 타격해 남북관계를 뒤집겠다는 단순 명쾌한 수순이다. 핵 개발을 경제 지원이나 체제 보장 협상용으로 생각했던 아버지 김정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담하고 입체적인 국가 전략이다.
 
핵은 절대무기다. 그 이상의 무기는 없다. 따라서 핵은 핵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동안 미국의 핵우산이 우리의 핵 부재를 메워 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ICBM 장착용 수소탄의 등장은 ‘미국이 본토 공격의 협박을 받으면서까지 한국을 위해 핵전력을 지원해줄까’라는 의문을 낳을 것이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도 오직 경제 주판알만 튀기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폐기하겠다”고까지 했으니 ‘피로 맺은 혈맹’의 약속이 허망해졌다. 그렇다면 한국인들 사이에 ‘우리도 자위권 차원에서 핵무장 선언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미국이 허용할 수 없다면 전술핵이라도 빌려줘야 한다는 요구를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송영무 국방장관이 며칠 전 미국 국방장관과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만나 전술핵 배치 얘기를 꺼낸 것은 시의 적절했다. 송 장관은 “우리 야당이나 언론에서 전술핵을 재배치하라는 요구가 있다”는 사실 제시형 어법을 사용했지만 그 바닥에 한국인의 열망과 위기감이 깔려 있음을 암시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문재인 정부는 그동안 미·북 대화를 주선해 평화협정을 맺으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적 로드맵을 갖고 있었다. 만사휴의(萬事休矣)! 한시바삐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설사 미·북 간 평화협정이 체결된다 해도 북한은 전략핵 국가의 지위를 포기하지 않는다. 미국한테 체제 보장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체제를 지킬 수 있는 나라가 됐기 때문이다. 대신 북한이 압도적으로 유리해진 국제 전략적 지위를 이용해 한국을 외교적으로 능멸하고 경제적으로 수탈하고 사회·문화적으로 분열시키려 할 것임은 불 보듯 환하다. 김정은의 야비하고 탐욕스러워 보이는 웃음에 핵 협박을 통한 한국 지배가 눈앞에 다가왔다는 자신감이 어른거리는 듯하다. 어떻게 키운 대한민국인데. 빈곤에 찌든 전체주의 독재 정권에 핵 인질로 질질 끌려다니며 살 수는 없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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