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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칼럼] 헌재소장 임명동의 더 미룰 명분 없다

중앙일보 2017.09.04 01:57 종합 35면 지면보기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어수선하다. 9년 만에 정권을 잡았다. 적폐 청산을 주요 과제로 설정했다. 기존 질서를 허물고 다시 세우려니 어느 정도 불안정한 상황을 피할 수 없다. 그럴수록 조급하지 않아야 한다. 돌아가는 것 같아도 차근차근 절차를 밟아 제도를 바꾸는 것이 튼튼하고 오래간다.
 

헌재소장 흥정거리 삼는 건 잘못
통과시킬 거라면 빨리 처리해야
정해진 절차 따라 예측 가능해야
로또 아닌 정당한 노력 보상 받아

사회가 뒤숭숭해지면 기득권 세력만 불안한 게 아니다. 예측이 어려워지면 로또 사회가 된다. 정당한 노력이 보상을 받지 못하고, 운 좋은 도박꾼만 횡재한다. 돈과 인맥으로 무장한 사람이 유리해진다. 어떤 새 질서건 빨리 안착시켜야 하는 이유다.
 
특히 사법부의 동요는 걱정스럽다. 사법부는 국민이 기댈 마지막 언덕이다. 국회는 정파적 이해가 동력이다. 정부도 대통령에 따라 오락가락한다. 그나마 사법부는 우리 사회의 안정을 유지해주는 중심축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일개 공기업처럼 흔들리는 모습이 영 불편하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 중 대법관 14명 중 13명, 헌법재판관 9명 중 8명이 바뀐다. 사법부의 이념적 지형이 크게 바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가 정해놓은 질서다. 사법부는 그동안 여러 가지 고비를 넘으면서도 스스로 변화를 소화하고 안정을 유지해왔다. 이번에도 너끈히 그럴 거라 믿는다. 그렇지만 일부 판사와 집권당의 움직임은 불안하다.
 
인천지방법원의 한 판사는 “재판이 곧 정치라고 말해도 좋은 측면이 있다”는 글을 내부 게시판에 올렸다. 물론 그는 ‘직업으로서의 정치’가 아니라 ‘사회집단 상호 간의 이해관계 조정’이라는 정치라고 단서를 달았다. 그런데도 그의 주장은 지나치다. 그는 “남의 해석일 뿐인 대법원의 해석·통념·여론 등을 추종하거나 복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했다. “개개의 판사들 저마다의 정치적 성향이 있다는 진실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이제는 이를 존중해야 한다”고도 했다.
 
개별 판사의 소신을 위한 재판이 아니라 시민을 위한 재판이다. 소송 당사자인 국민이 먼저다. 판사들 사이의 이견은 그 내부에서 소화해야지 서로 다른 판결을 던져놓고 국민에게 감당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그 혼란을 어떻게 감당할 건가. 소송 당사자가 판사를 고를 수도 없는 일이다.
 
기존 체제에서도 판례는 뒤집혔다. 그런 절차를 밟아 차이를 녹이고, 시대에 맞춰 변화해왔다. 그래도 해결이 안 된다면 법률을 바꿔야 한다. 입법부가 할 일을 사법부가 대신할 수는 없다.
 
비난을 받지만 국회의원은 국민이 표로 선출한 대표다.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임기가 있고 4년 뒤, 5년 뒤에는 재평가와 심판을 받는다. 하지만 판사는 시험 한 번으로 임용돼 평생을 봉직한다. 그들이 재판으로 정치하는 권리를 위임받은 일은 없다.
 
집권당 대표는 이미 확정 판결로 형기까지 마친 재판을 “기소도 잘못됐고 재판도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재판을 법률로 따지지 않고 정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런 정당이 집권한 정부에서 ‘파격적인’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을 임명하니 정치적 편향성을 의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임기가 보장된 방송사 사장들에게 물러나라고 압력을 가하는 것도 제도를 무시하는 인상을 준다. 내부의 거센 반발을 보면 현 사장들에게 문제가 많을 수 있다. 그러면 오해받지 않도록 정면으로 시비를 가리는 게 옳다.
 
그들이 정권과 임기를 함께하는 게 옳다면 법을 바꿔야 한다. 정치적 편향성을 없애려면 역시 제도를 고쳐야 한다. 그런데 특정 정파 의지대로 공영방송 사장을 임명하지 못하도록 고친 방송법 개정안을 문재인 대통령이 제동을 걸었다. ‘소신 없는 사람’이 된다고 걱정한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임명하고,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억지다.
 
그렇게 해서는 5년마다 전쟁을 피할 수 없다. 정권 교체를 몇 번 해봤다. 그 정도 경험을 쌓았으면 이제 제도로 정착시킬 때도 되지 않았나. 답답해도 돌아가는 게 정답이다.
 
자유한국당이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를 붙들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국가 권력의 한 축인 헌재소장을 정치적 흥정거리로 삼는 것은 지나치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문 대통령 임기 중에 헌법재판소장을 임명하게 돼 있다. 청문회를 마치고 야당도 통과시키기로 방침을 정했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 문제도 아닌 외교부 장관이나 다른 재판관 후보자, 이제 방송 파동에 묶어 제쳐놓았다. 청문회를 마친 지 석 달이 다 됐다. 7개월째 공백이다. 모든 걸 정쟁으로 삼는 건 곤란하다. 제도를 만든 사람들이 스스로 정해놓은 질서를 무시하는 행태는 이제 버릴 때가 됐다.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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