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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려라 공부] 청·일 정세 어두워 골든타임 놓친 조선 … 결과는 참혹한 전란

중앙일보 2017.09.04 01:06 종합 20면 지면보기
역사 속 전란의 교훈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도발과 핵실험에 한반도에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데요. 이번 ‘큰별쌤 최태성의 한국사 NIE’에선 전쟁의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를 역사 속에서 찾아봤습니다. 반면교사의 교훈을 들려줄 역사 속 장면은 조선이 겪은 두 번의 전쟁,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입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조선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그 속에서 오늘의 우리가 깨달을 교훈은 무엇인지 찾아봤습니다. 열공상담소에선 최근 청소년 사이에 퍼지는 ‘사이버 도박’에 대해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어봤습니다.

열도 통일 후 세력 키워가던 일본
‘오랑캐’로 얕보다 허찔린 임진왜란

지는 해 명나라와 사대관계 연연
청나라 무시하다 당한 병자호란

북한 도발로 긴장 높아지는 한반도
외교·군사적 대비에 빈틈 없어야

북한의 거듭되는 미사일 도발, 핵 개발 시도에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북한의 위협에 한국과 미국은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를 배치했고 중국이 이에 항의하면서 한·중, 미·중 간 외교 갈등도 심화되고 있다. 한반도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이와 유사한 위기와 갈등을 겪은 일은 역사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이 겪은 두 차례의 전쟁을 살펴보며 전쟁 위기 극복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와 자세를 돌아보자.
 
조총 무장한 20만 왜군, 20일 만에 한양 점령
매년 10월 부산시 동래읍성 일대에서 열리는‘동래읍성문화축제’에선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전투 장면을 재연한다. 조선시대 생활상을 재연하고 전통 문화를 체험하는 기회가 마련된다.[중앙포토]

매년 10월 부산시 동래읍성 일대에서 열리는‘동래읍성문화축제’에선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전투 장면을 재연한다. 조선시대 생활상을 재연하고 전통 문화를 체험하는 기회가 마련된다.[중앙포토]

 
120여 년간 분열돼 있던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2년(선조 25년) 조선을 침략했다. 영주들의 불만을 나라 밖으로 돌려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고 명과의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근대적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20만 명의 왜군은 20일 만에 수도 한양을 점령했다. 임금은 의주로 피란 가고 백성과 국토는 왜군에 의해 유린당했다. 의병과 수군의 활약으로 결국 일본을 물리쳤지만 7년간의 전쟁에서 조선은 이루 다 말하기 어려운 피해를 겪었다.
 
조선은 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지 못했을까. 조선은 연산군 이후 훈구파와 사림 세력 간의 정쟁으로 정치적 혼란이 거듭됐다. 군인을 왕릉 축조, 성곽 보수에 동원하는 군역의 ‘요역화’가 나타나면서 군역 기피가 만연했다. 이에 따라 국방체제가 사실상 붕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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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상황 속에 1583년 병조판서 율곡 이이는 전쟁 위험을 경고하면서 ‘10만 양병설’을 건의했다. 그는 “나라가 오래 태평하여 태만함이 날로 더해 안팎이 텅 비고 군대와 식량이 모두 부족하니, 큰 적이 침범해 온다면 아무리 지혜로운 자도 계책을 쓸 수가 없을 것”(『선조실록』)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건의는 빈약한 국가 재정 탓에 시행되지 못했다. 오히려 동인이 ‘당쟁을 조장한다’며 탄핵해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조선은 전쟁의 위험을 파악하는 데도 실패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앞선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수교와 통신사 파견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을 ‘오랑캐의 나라’로 업신여기던 조선은 통신사 파견을 놓고 갑론을박을 계속했다. 결국 ‘교섭이 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일본 사신의 암시를 받고야 통신사 파견을 결정했다.
 
일본에 다녀온 사신들의 보고는 제각각이었다. 정사(正使)로 파견된 황윤길은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반면 부사(副使) 김성일은 “그런 정황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하면서 “(임금에게)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난다”고 되레 황윤길을 비판했다.
 
황윤길은 서인, 김성일은 동인이었다. 당시 조정에선 동인의 세력이 강했다. 선조는 서인인 황윤길의 의견을 묵살했다. 일본 사신을 맞이한 선위사(宣慰使) 오억령은 사신으로부터 “내년에 일본이 조선의 길을 빌려 명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를 조정에 알렸으나 그는 ‘민심을 소란하게 한다’는 이유로 오히려 파직됐다.
 
선조와 조정이 전쟁 가능성을 외면하는 사이 일본은 조총과 병선을 대량 생산하는 등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외침에 대비할 ‘골든타임’을 놓쳤던 조선은 7년간의 전란에서 막대한 피해를 봤다.
 
이처럼 국제 정세 변화, 현실인식에 둔감한 태도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채 30년도 되지 않아 발생한 정묘호란(1627년·인조 5년)에서도 재현됐다. 정묘호란 당시 조선 조정은 후금이 국경을 넘은 사흘 후에야 침입 사실을 알았다. 후금이 침략한 이유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남한산성 겨울 풍경. 1636년 병자호란 당시 피란길에 오른 인조가 이곳에서 청군에게 포위되는수모를 겪었다.[중앙포토]

남한산성 겨울 풍경. 1636년 병자호란 당시 피란길에 오른 인조가 이곳에서 청군에게 포위되는수모를 겪었다.[중앙포토]

 
조선이 사대 관계를 맺고 있던 명은 16세기 왜구의 침입, 내란 등으로 혼란을 겪은 데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지원군을 파견하면서 국력이 쇠약해졌다. 이 틈에 만주의 여진족이 성장해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이러한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쳤다. 하지만 인조반정을 일으켜 집권한 서인 세력은 달랐다. 인조와 서인은 명과의 사대 관계를 중시하며 ‘친명배금’ 정책을 추구했다. 후금은 명과의 전면전을 준비하던 중 미리 조선과 명 사이의 동맹을 끊기 위해 조선을 침략했다.
 
파죽지세로 밀고 온 후금의 군대는 순식간에 평양성을 무너뜨렸다. 병사 3만 명으로 보름 만에 조선 국토의 25%가량을 유린했다. 전면전에 대한 방비가 소홀했던 조선은 왕이 도성을 떠나 피란길에 올랐다. 결국 후금과 조선이 형제 관계를 맺는 것으로 화의가 진행돼 정묘호란은 마무리됐다. 후금의 군대는 무자비한 약탈을 자행했고, 조선 백성들은 고통에 휩싸였다.
 
쓰라린 패배에도 조선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후금은 “인조의 동생을 인질로 보내라”고 조선에 요구했다. 하지만 조선은 다른 왕족을 인조의 동생으로 둔갑시켜 보냈다.
 
병자호란 이후 50만 명 이상 청에 끌려가
 
굴욕의 역사가 서린 삼전도비.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항거하던 인조가 서울 삼전도(지금의 송파구 석촌동)에서 청군에게항복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중앙포토]

굴욕의 역사가 서린 삼전도비.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항거하던 인조가 서울 삼전도(지금의 송파구 석촌동)에서 청군에게항복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중앙포토]

후금은 인조의 비(인열왕후)가 죽자 조문단을 파견했다. 조선은 “오랑캐로부터 절을 받을 수 없다”며 가짜 빈소를 마련하기도 했다. 후금의 홍타이지(누르하치의 아들)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황제에 오르자 주변국 사신들이 즉위식에 참여했다. 모든 사신이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절했지만 조선 사신은 절을 하지 않고 꼿꼿이 서 있었다.
 
결국 1636년 청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는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외교적으로 강경한 태도를 보인 조선은 정작 전쟁 대비엔 소홀했다. 전쟁 5일 만에 한양을 점령당했다. 인조는 피란길에 올랐다가 남한산성에서 청군에 포위됐다.
 
매서운 추위에 군사가 얼어죽고 식량 보급마저 차단된 상황이었으나 조정에선 논쟁이 거듭됐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척화파의 대표적 인물인 김상헌은 “지금 사죄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청의) 노여움을 풀겠나. 따르기 어려운 요청을 끝내 반드시 해 올 것”이라며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반면 주화파의 최명길은 “대적할 경우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라며 화친을 제안했다.
 
결국 항전 47일 만에 항복한 인조는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아홉 번 땅에 이마를 찧으며 세 번 절하는 의식)’라는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치렀다. 명과는 아예 외교 관계를 끊어야 했다. 청과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로 바뀌었다. 승리한 청의 군대는 약탈을 일삼았다. 최명길의 기록에 따르면 50만 명 이상이 청에 끌려갔다. 병자호란 직후 조선 인구가 약 850만 명으로 추정된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다.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안일한 자세로 위기에 대응한 결과 조선은 참혹한 전란을 겪었다. 또한 전란의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조선이 겪은 전쟁과 임금·조정의 실패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을까.
 
최태성 한국사 강사, 정리=박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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