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한제국과 만난 현대미술, 덕수궁에 들어온 현대미술

중앙일보 2017.09.04 00:05
 덕수궁과 현대미술, 아니 대한제국과 현대미술이 만났다. 국내 작가 9명이 대한제국(1897~1910)의 자취를 새롭게 해석하고 조명한 작품들이 덕수궁 곳곳에 설치됐다. 국립현대미술관과 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가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전시 '덕수궁 야외프로젝트:빛·소리·풍경'이다. 비운의 역사만 아니라 근대화의 여명으로 대한제국을 조명하는 시각이 두드러진다. 
정연두, '프리즘 효과', 2017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정연두, '프리즘 효과', 2017사진=국립현대미술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는 단연 이번 전시의 주인공감이다. 정연두 작가는 고종황제와 어린 딸 덕혜옹주를 다면적으로 조명하는 사진작품 '프리즘 효과'를 석조전 복도각에 선보인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덕수궁 석조전 테라스에 선 모습을 각기 다른 방향, 다른 시각에서 찍은 대형 사진 네 점을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내걸었다. 같은 인물, 같은 차림에도 사진마다 분위기가 다른 것이 흥미롭다. 작가가 석조전 사방에 있던 건축과 그 상징성을 염두에 둔 결과다. 북쪽은 영국·미국·러시아 등 열강의 공관, 서쪽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 남쪽은 대한제국 최고재판소(평리원,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자리)가 있던 곳이다. 이를 바탕으로 각 사진은 두 사람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 침략자의 시선, 공적인 시선을 의도했다. 여느 아버지와 딸처럼 이들을 조명하는 사적인 시선도 있다. 준명당, 즉 고종이 덕혜옹주를 위해 궁궐 안에 만든 유치원이 있던 동쪽이다. 

'덕수궁 야외프로젝트: 빛·소리·풍경'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 기념 11월 26일까지
밤이면 더 빛나는 현대미술작품 곳곳에 설치

 사진 중 한 점에선 부녀의 등 뒤로 현대의 관람객들이 등장한다. 사진 스스로 실제가 아닌 재연임을 드러내는 동시에 같은 자리에서 100여년 전 과거를 현재와 나란히 불러내는 순간이다. 촬영과정에 대해 정연두 작가는 "고종과 덕혜옹주의 사진을 바탕으로 닮은 인물을 수소문했다"며 "의상은 전통문화연구소 온지음 옷공방이 당시의 실제 사료를 연구해 복원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고종과 대한제국에 대해 한층 풍부하고 다양한 접근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대한제국은 한국 역사의 블라인드 스팟(사각지대)"이라며 "국권을 잃은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인 동시에 일찌감치 전기, 전차 등을 놓으며 근대국가로 발전하기 위해 발돋움한 시기"라고 지적했다.   

권민호, '시작점의 풍경', 2017사진=이후남 기자

권민호, '시작점의 풍경', 2017사진=이후남 기자

권민호, 시작점의 풍경, 2017 사진=국립현대미술관

권민호, 시작점의 풍경, 2017 사진=국립현대미술관

 근대화에 대한 주목은 석어당에 설치된 권민호 작가의 드로잉 작품 '시작점의 풍경'에서 한층 뚜렷해진다. 석어당의 정면 윤곽을 그린 안쪽에 근대는 물론 산업화의 현대적 풍경까지 다채롭게 그려 넣었다. 예컨대 1899년 노량진과 제물포를 연결한 국내 최초의 철도 위를 달린 증기기관차 모갈 1호와 지금의 KTX가 나란히 등장한다. 흑백 드로잉에 애니메이션 영상을 투사, 기차가 움직이고 조선소의 용접 불꽃이 튀는 효과를 더한 것도 흥미롭다.   
장민승x양방언, 온돌야화, 2017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장민승x양방언, 온돌야화, 2017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중화전 앞 행각에 설치된 '온돌야화'는 근대의 풍경을 더욱 다채롭게 보여준다. 100여년 전 촬영된 수많은 원판 사진을 인물의 표정과 새로운 문물이 부각되도록 확대하거나 잘라 새로 만든 슬라이드 영상을 음악에 맞춰 영사한다. 미술가 장민승과 음악가 양방언의 공동작품이다. 기역자 형태의 터널 같은 설치물 안에 작품을 선보이는 것도 재미있다. 터널 겉면은 거울처럼 만들어 덕수궁 풍경을 반사한다. 안쪽은 검게 만들어 그 옛날 검은 천을 덮고 원판 사진을 찍던 카메라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강애란, '대한제국의 빛나는 날들', 2017사진=국립현대미술관

강애란, '대한제국의 빛나는 날들', 2017사진=국립현대미술관

 고종이 알현실로 썼던 덕홍전은 가상의 서재처럼 꾸며졌다. 이곳에 강애란 작가는 고종이 즐겨 읽던 서적과 외교문서, 조선왕조에 대한 사료들을 빛을 발하는 책의 형태로 만들어 서가에 배치한 '대한제국의 빛나는 날들'을 선보인다. 그 맞은편에는 임수식 작가의 '책가도389'가 자리했다. 근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책꽂이를 찍은 실제 사진을 병풍처럼 연결하고 책장 사이사이 고종 등의 사진도 배치한 작품이다.     
강애란, 대한제국의 빛나는 날들, 2017사진=이후남 기자

강애란, 대한제국의 빛나는 날들, 2017사진=이후남 기자

임수식, 책가도389, 2017사진=국립현대미술관

임수식, 책가도389, 2017사진=국립현대미술관

이진준, 어디에나 있는 하지만 어디에도 없는 시리즈 - 불면증 & 불꽃놀이, 2017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이진준, 어디에나 있는 하지만 어디에도 없는 시리즈 - 불면증 & 불꽃놀이, 2017 사진=국립현대미술관

 불면증에 시달리던 고종의 침전이자 1907년 그가 승하한 곳인 함녕전에서는 영상과 함께 폭죽 소리가 흘러나온다. 실제 불꽂축제에서 채집한 사운드이지만 환희의 축포 같은 느낌과 전쟁의 포화 같은 느낌이 혼재한다. 이진준 작가의 작품 '어디에나 있는 하지만 어디에도 없는-불면증&불꽃놀이'다. 구형 라디오 등을 해체한 부품 등을 연결해 만든 김진희 작가의 '딥 다운-부용'도 시각보다 청각적 효과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오재우 작가의 '몽중몽'처럼 VR로 감상하는 작품도 있다. 작가가 덕수궁에서 받은 "누군가의 꿈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덕수궁 안팎의 모습과 퍼포먼스를 결합해 표현했다. 
오재우, 몽중몽, 2017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오재우, 몽중몽, 2017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이번 전시는 2012년의 '덕수궁 프로젝트'에 이어 고궁의 역사성과 현대미술의 조형성이 만난 두 번째 시도다. 대한제국이라는 한층 예각화된 모티브가 돋보인다. 대한제국의 짧은 역사가 덕수궁의 오랜 역사에서 가장 강렬했던 시기란 점에서 무대를 제대로 찾은 셈이다. 함녕전 앞 행각, 석조전 복도각 등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 곳까지 작품을 설치해 관람객을 맞는다. 밤이면 조명과 함께 더욱 멋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덕수궁이 휴관하는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후 8시까지 입장, 9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11월 26일까지.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