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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자의 미모 맛집 29]17세기 나온 첫 한글 레시피북 음식

중앙일보 2017.09.04 00:01
재령 이씨 가문 1대 종부 장계향 선생이 남긴 레시피를 바탕으로 조선 사대부가의 종가음식을 재현하는 음식디미방. [사진 한국관광공사]

재령 이씨 가문 1대 종부 장계향 선생이 남긴 레시피를 바탕으로 조선 사대부가의 종가음식을 재현하는 음식디미방. [사진 한국관광공사]

딸들은 베껴는 가도 절대 가지고 가지는 마라.” 

1670년 나온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레시피북’ 이자 동아시아에서 여성이 쓴 첫 조리서인『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말미에 적힌 문구다. 책 저자는 재령 이씨 석계가문의 1대 종부 장계향(1598~1680) 선생. 딸에게 전하는 장 선생의 엄중한 ‘경고문’을 읽고, 외람되게도 웃음이 나버렸다. 호시탐탐 책을 노리는 딸들의 손을 찰싹찰싹 때리는 엄마의 모습이 상상됐기 때문이랄까.
17세기 집필된 최초의 한글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 [사진 한국관광공사]

17세기 집필된 최초의 한글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 [사진 한국관광공사]

어머니의 음식 조리서를 탐내지 않을 딸은 없다는 것을 장 선생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딸에게 ‘베껴만 가라’고 엄포를 놓은 것은, 책에 적힌 종가의 음식 맛이 대대손손 이어지길 바라는 선생의 마음이 그만큼 컸다고만 짐작할 뿐이다. 선생의 바람대로 『음식디미방』은 35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 소실되거나 분실되지 않고, 석계가문 종부에서 종부에게로 이어져왔다. 

국내 첫 한글 음식조리서는 1670년 『음식디미방』
양양의 '음식디미방'은 종부가 그대로 음식 재현
어만두·이화주 등 조선 양반가 음식 일품
단체손님 있는 날만 문 열기에 예약 필수

이 책의 놀라운 점은 우선 한글로 써졌다는 것, 그리고 재료를 고르고 다듬고 음식을 만드는 과정까지 자세히 적어놓았다는 것이다. 덕분에『음식디미방』은 지금도 유효한 ‘레시피북’으로 쓰이고 있다. 재령 이씨 집성촌인 경북 영양의 두들마을에 2010년 문을 연 종가음식 체험장 ‘음식디미방(054-682-7764)’을 방문하면, 『음식디미방』을 바탕으로 재현한 조선 사대부가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재령 이씨 집성촌 경북 영양 두들마을. [사진 한국관광공사]

재령 이씨 집성촌 경북 영양 두들마을. [사진 한국관광공사]

음식디미방은 메뉴를 주문하면 음식이 뚝딱 나오는 일반 음식점은 아니다. ‘크게 상차림을 하는 날에만 운영한다’는 원칙이 있어 10인 이상 단체 예약을 해야 겨우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다행히(?) 단체 예약이 있는 날에는, 2~3명 소규모로 오는 손님도 받아준다. 음식점이 아니라 체험장이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다. 방문하기 전에 반드시 예약 가능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장계향 선생의 표준 영정. [사진 한국관광공사]

장계향 선생의 표준 영정. [사진 한국관광공사]

석계가문 13대 종부 조귀분씨. 양보라 기자

석계가문 13대 종부 조귀분씨. 양보라 기자

하지만 이런 불편함에도 음식디미방을 찾아오는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조선 사대부가의 음식을 맛본다는 점도 매력적이거니와 무엇보다 종가음식이 맛있기도 해서다. 음식디미방을 이끌고 있는 석계가문 13대 종부 조귀분(69)씨는 “원서를 최대한 따르지만 현대에 맞지 않는 조리법이나 재료는 조금씩 바꾸면서 가문의 음식을 이어간다”고 밝혔다. 이를테면 잡과편(견과류 가루를 가득 묻힌 떡)에 대해 『음식디미방』은 ‘잣·대추·밤·곶감을 잘게 썰어 고명을 준비하라’고 전하지만 체험장 음식디미방에는 통잣이 들어간다. 잣가루와 밤 가루가 섞여 식감을 헤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두들마을에 있는 종가음식 체험장 음식디미방. 양보라 기자

두들마을에 있는 종가음식 체험장 음식디미방. 양보라 기자

그 당시 음식과 100% 똑같을 수는 없겠지만, 음식디미방에서 만나는 17세기 조선음식은 하나같이 이채롭다. 종가의 일꾼에게 먹였다는 도토리죽, 당면 대신 꿩고기를 넣은 잡채는 현대식 잡채와 이름만 같았지 전혀 다른 메뉴다. 손님에게 인기가 많은 메뉴는 ‘어만두’인데 얇은 피에 두부와 숭어로 만든 소를 넣어 미꾸라지처럼 길고 가늘게 빚어낸다. 우물우물 씹을 것도 없이 부드러운 만두가 목구멍을 타고 술렁 넘어간다.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 사실 음식디미방이 재현한 종가음식은 때로 덤덤하고 심심하기도 할 테다. 슴슴한 평양냉면에 길들여지는 데 시간이 걸리듯 종가음식도 충분히 시간을 두고 깊이를 알아가야 할 음식인 듯하다.  
숭어와 만두로 소를 만들어 빚은 어만두. 양보라 기자

숭어와 만두로 소를 만들어 빚은 어만두. 양보라 기자

음식다미방의 잡채. 당면을 넣지 않고 꿩고기에 절임 채소를 곁들인다. 양보라 기자

음식다미방의 잡채. 당면을 넣지 않고 꿩고기에 절임 채소를 곁들인다. 양보라 기자

음식디미방에서는 2가지 코스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정부인상(1인 5만5000원)과 소부인상(1인 2만9000원)이다. 메뉴 구성은 비슷하지만 정부인상에는 전통주 2~3 종류를 식사와 함께 맛볼 수 있다는 게 다르다. 장계향 선생은 술을 빚는 데도 탁월한 식견이 있어 『음식디미방』에도 10여 가지 전통주 레시피를 함께 실어 놨다. 음식디미방의 술은 당연히 책에 적힌 전통주를 재현한 것이다. 술 한 모금 마시는 것만으로도 몇 백년의 시간을 건너뛴 듯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으니, 웬만하면 전통주가 페어링되는 정부인상을 선택하라 권한다. 밀 누룩으로 빚은 감향주, 쌀가루로 만든 이화주 등 진귀한 술이 종가음식의 맛을 돋았다. 조귀분씨는 음식 조리는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도, 누룩을 빚는 일은 여전히 자신의 몫으로 남겨 놨다. 
양반가에서 만들어 마셨던 귀한 술 이화주. 요거트처럼 떠 먹는 술이다. 음식디미방에서 맛볼 수 있다. 양보라 기자

양반가에서 만들어 마셨던 귀한 술 이화주. 요거트처럼 떠 먹는 술이다. 음식디미방에서 맛볼 수 있다. 양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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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보라 기자 bo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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