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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중앙선데이 2017.09.03 02:00 547호 32면 지면보기
유럽 출장을 갔다가 천으로 만든 에코백(eco bag)을 12개나 사 버렸다. 환경을 보호하자고 만든 가방이 뭐 그리 알록달록 예쁘던지, 수시로 나타나는 ‘지름신’에 속수무책으로 굴복하고 말았다. ‘이것이 과연 나에게 필요한 물건인가’라는 질문은 집에 돌아와 여행 가방을 푼 후 방바닥에 쌓인 거대한 기념품 더미를 보면서야 떠올랐다. 때마침 도착한 이 책은 폭풍 쇼핑 후 허무감에 빠진 나를 이렇게 위로한다. “현대인은 소비하는 인간, 즉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라고 불리기도 한다. 더욱이 인공지능을 탑재한 기계가 생산과 노동을 무섭게 점령해가는 상황에서 소비는 머지않아 인간에게 남은 가장 중요하고도 고유한 활동이 될지도 모른다.”
 

『소비의 역사』
저자: 설혜심
출판사: 휴머니스트
가격: 2만5000원

‘소비’라는 키워드로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는 책이다. 저자인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그동안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역사학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온천, 관상학 등 조금 독특한 테마를 연구 주제로 삼아 왔다. 이번에 시도한 소비사(史)는 서양 학계에서도 가장 최근에 출범한 분야로 2000년 이후 활발히 연구가 진행 중이다. 설 교수는 이런 학계의 흐름을 정리하면서 자신만의 시각으로 ‘소비’의 역사적 의미를 정리해나간다.
 
물건을 구입해서 사용하는 행위인 소비에는 정치적·사회적 환경에 의해 촉발된 인간의 내밀한 욕망과 동기가 담겨 있다. 또 그 과정에는 ‘상상력, 관계 맺기, 구별 짓기, 도덕, 이데올로기, 자원의 보존과 낭비’ 등 다양한 사회적 요소가 복잡하게 얽히게 된다. 예를 들어 프랑스혁명 이전의 프랑스에서는 신분에 따른 옷의 소비 행태가 명확히 구분돼 있었다. 왕족과 귀족 남성의 옷차림과 액세서리는 여성보다 훨씬 화려했고, 반면 시골의 농부들은 투박한 직물로 된 초라하고 낡은 옷을 대충 입었으며 속옷은 거의 입지 않았다. 혁명이 일어나고 반(反)귀족 정서가 팽배해지면서 귀족들은 과시적인 복식을 자제하기 시작한다. 옷차림 만으로 신분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든 단순하고 통일된 형태의 신사복이 이 시기부터 등장하고 이를 소비하는 문화가 사회 전반에 퍼지게 된다.
 
여성은 남성보다 화려한 옷을 즐겨 입고 치장을 위한 소비를 즐기는 경향이 있는데, 이 또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산업화가 상당히 진행된 18세기 유럽에서 자본을 축적한 남성들은 소비를 하고 싶어도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부를 과시할 수 없었다. 대신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아내나 딸, 연인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인 능력을 드러내고자 했다. 『유한계급론』을 쓴 미국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1857~1929)은 이런 현상에 대해 “근대 소비 사회는 여성을 남성이 생산하는 물건에 대한 의례적 소비자(Ceremonial Consumer)로 만들어버렸다”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비누라는 상품은 ‘청결=하얀 피부’라는 인종차별적인 환상을 매개로 검은 피부를 가진 피식민지인들에게 퍼져나갔다. 재봉틀은 사회적으로 여성의 노동이 필요해지는 상황 속에서 노동의 성별 분리를 가속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소비 행태의 변화는 새로운 정신질환도 만들어냈다. 19세기 중후반이 되면서 ‘자신에게 필요 없는 물건, 혹은 자신이 쉽게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물건을 훔치는 병적인 충동’을 의미하는 ‘병적 도벽(kleptomania)’을 앓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너무 많은 물건을 손님들의 바로 눈 앞에 매혹적으로 전시하는 백화점의 등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각주를 포함해 500쪽 가까운 분량이지만 ‘소비하는 인간’, 바로 나 자신과 밀접하게 관련된 역사가 생생하게 펼쳐져 있어 책장은 놀랄 만큼 빨리 넘어간다. 뒤편에 친절하게 정리된 ‘서구 소비사의 현황과 전망’은 본격적으로 이 분야를 탐구해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듯.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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