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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경주의 스펙터클을 무대로 … 역발상의 미학

중앙선데이 2017.09.03 02:00 547호 30면 지면보기
하반기 최고의 기대작으로 꼽히는 뮤지컬 ‘벤허’의 막이 올랐다. 대극장 창작 뮤지컬 최초로 일본에 라이선스 수출되는 등 크게 성공한 ‘프랑켄슈타인’(2014)의 창작진이 다시 뭉쳐 야심차게 도전한 작품이다. 지난해 개막 예정이었으나 한 차례 연기되고 중간에 제작사가 바뀌는 등 우여곡절 끝에 공개되는 터라 더욱 이목이 쏠렸다.
 

뮤지컬 ‘벤허’
기간: 10월 29일까지
장소: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문의: 1544-1555

제작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기대가 컸다. 어린 시절 TV ‘명화극장’의 대명사였던 1959년작 고전 영화의 이미지가 아련하다. 남북전쟁 영웅인 루 월리스 장군의 베스트셀러 소설 『벤허: 그리스도의 이야기』(1880)를 원전 삼은 영화는 명절 때마다 방송되곤 했지만, 전차 경주 씬의 스펙터클만큼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아 채널을 돌릴 수 없었다. 국내 개봉 당시 최초의 70mm 대형화면으로 대한극장에서 6개월 동안 상영되고도 몇 차례 재상영까지 됐다니, 그만큼 중장년세대에게 특별한 감흥을 주는 추억의 콘텐트임은 분명하다.
 
기대만큼 의문도 들었다. 먼저 영화에 붙는 ‘20세기 최고의 종교영화’라는 수식어가 근본적인 한계로 다가왔다. ‘벤허’는 예수의 복음 전파가 중심을 이루는 몹시 기독교적인 내용이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의 지배를 받던 유대의 귀족 유다 벤허가 로마 호민관이 된 친구 메셀라의 배신으로 모든 것을 잃고 온갖 시련을 겪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흥망성쇠의 인간사가 펼쳐진다. 부와 명예를 되찾고 복수에도 성공하지만 결국 예수의 대속으로 진정한 구원을 얻는다는 이야기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곧 생활문화였던 당시 미국에서 보편적인 흥행 코드였다.
 
하지만 이게 반세기도 더 지난 지금 한국의 뮤지컬판에서 유효할까. 똑같이 예수의 대속을 소재 삼은 세계적인 흥행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1971년 초연된 고전임에도 록의 반항 정신으로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며 보편성을 획득했었다. 고전 비틀기도 아니고 20세기 중반의 신실한 종교관을 그대로 무대에 풀어놓는 것이 교회 칸타타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애초에 대놓고 기적을 보여주며 복음을 전하는 게 본질인 ‘벤허’가 종교색을 걷어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형식은 더욱 궁금했다. ‘벤허’하면 광활한 로마 제국을 무대 삼은 웅장한 스케일과 전차경주, 해상전투 씬등의 남성미와 박진감 가득한 스펙터클의 대명사 아닌가. 특히 CG의 힘을 빌릴 수 없던 시절 거대한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수십 마리 말과 엑스트라 5만 명을 동원해 5주 동안 촬영했다는 15분의 전차 경주 씬은 ‘벤허’의 시그니처이자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꼽힌다. 이 전무후무한 스펙터클을 비좁은 무대에서 대체 어떻게 해석해 낼까.
 
하드웨어는 기대 이상이었다. 원형 경기장과 대저택, 로마신전, 지하무덤 카타콤, 노예선 등 각종 대형 세트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수십 차례 장면 전환을 매끄럽게 구현했다. 스릴 넘치는 전차경주 씬은 역발상으로 풀었다. 다소 과장해 영국 국립극장의 명작 ‘워 호스’를 연상시키는, 관절이 움직이는 말들이 끄는 전차 딱 2대에 포커스를 맞춘 슬로우 모션으로 구현했다. 회전무대와 3D 영상의 합으로 조성해낸 공간감도 그럴싸했다. 스케일과 속도감을 버리고 내면의 긴장감을 클로즈업한 것이다.
 
창의적인 스토리 압축도 있었다. 메셀라의 비중을 높여 더욱 비열한 책략을 꾸미는 절대악적인 존재로 투톱 구도를 만들었다. 유다를 배신한 내면의 이유를 조명하고 ‘친구와의 약속’이라는 브로맨스 코드 뒤로 여러 에피소드를 정리했다.
 
하지만 우려대로 어정쩡한 종교관이 문제였다.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는 예수의 사랑을 받은 자가 다시 그 사랑을 베풂으로 진정한 구원을 얻게 된다는 큰 줄기가 모호하게 흐트러진 채, 시련과 고통, 부와 명예를 함께 준 신의 섭리와 ‘용서하라’는 성경의 직설적인 메시지가 산발적으로 던져지니 본질은 흐려지고 애매한 종교색만 남아 버렸다.
 
구성과 무대에 집중하다 음악을 놓친 감도 있다. 스토리 전개가 대사 위주로 진행되다 1막 후반부에 가서야 가창력을 뽐내는 노래들이 나오기 시작해 내내 갈증이 컸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히어로 박은태가 막판에 ‘겟세마네’급 폭풍고음을 터뜨려주며 아쉬움을 만회하긴 했지만, 기억에 남는 ‘한방’은 없었다.
 
또 한 편의 창작 뮤지컬이 탄생했고, 또 하나의 질문도 생겨났다. 진정한 무대 미학이란 뭘까.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선명한 이미지로 남아있는 명작 영화를 굳이 뮤지컬화할 때 관객은 무엇을 기대할까. 뮤지컬 ‘벤허’가 영화 ‘벤허’의 스크린을 뚫고 나오려면 객석에 더욱 생생하게 전달되는 감각적 요소와 새로운 감동에 대해 더 고민해야 할 것 같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뉴컨텐츠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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