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얼 경제사] 중세 순례길

그림1 안드레아 디 보나이우토, 1366년 작.

11세기 이후 기독교 순례 대중화
이슬람 메카, 불교의 인도 방문도
가치관과 정보 유통의 역할 수행
현대엔 한·일·몽골 올레길로 진화
이쯤 되면 그림 속 인물들에 대해 감이 온다. 이들은 성 야고보를 기리며 머나먼 여정을 떠난 순례자다. 이들이 향하는 곳은 성 야고보의 유해가 안치되었다고 믿어지는 스페인 북서쪽 끝자락의 성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다. 오늘날 세계 각지로부터 수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산티아고는 중세에도 예루살렘·로마와 함께 가장 중요한 순례지로 손꼽혔던 성지다. 중세 사람들이 대개 신앙적 목적으로 이곳을 찾았다면 오늘날의 방문객 중에는 종교와 무관하게 자기성찰의 경험을 갖고자 하는 이가 많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종교는 세계화를 이끄는 중요한 역사적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상인과 소비자들이 상품을 매개로 시장을 확대하고 통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성직자와 신도들은 신앙을 매개로 종교 세계를 확대하고 통합했다. 사람들의 지리적 이동성이 낮았던 시기에 순례는 장거리 여행이라는 매우 드문 기회를 제공했다. 순례를 통해 같은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 간에 신앙관과 사회적 가치와 생활방식이 교류되고 상호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불교·이슬람교 세계에서 모두 이런 상황이 펼쳐졌다.
신앙심 확인과 함께 관광과 모험의 기회
순례의 첫째 동기는 신앙심, 즉 참회와 각성의 기회를 가지려는 마음에 있었다. 그러나 순례를 이국의 정서를 경험하고 모험적 여행을 즐기는 기회로 삼은 이들도 분명 있었다. 특히 로마와 같이 관광지의 성격이 꽤나 짙은 성지에 이런 이들이 많았다. 15세기에 발간된 성지여행서를 보면 여행경로는 물론이고 각지의 관습과 특산물, 교역 방법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중세판 여행가이드북인 셈이었다. 신앙 외에 관광도 부분적 목적이었다는 점에서 중세의 순례는 18세기에 공부와 유흥을 겸해 부유층이 나선 그랜드 투어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중세 유럽에서 장거리 순례가 빈번히 이뤄진 것과 대조적으로 중국에서는 국경을 넘는 순례가 많지 않았다. 중국을 대표하는 순례자는 인도의 불교성지를 찾아가는 학승들이었다. 불교가 실크로드를 통해 유입됐기 때문에 불교 경전이 번역과정에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문제점을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인도에 가서 원전을 입수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399년에 중국을 떠나 인도를 방문하고 불경을 수집한 동진의 법현(法顯)이 바로 이런 순례자였다. 그가 귀국해서 집필한 『불국기』는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대해 소상히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됐다. 627~629년에는 당나라에서 고승으로 명성이 높았던 현장(玄奘)이 인도로 향했다. 그 역시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불경 원전들을 수집하고서 645년 귀국했다. 이후 현장은 불경을 번역하고 인도 여행기인 『대당서역기』를 저술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림2는 현장이 수많은 불경을 가지고 당으로 돌아오는 광경을 보여 준다. 승려들과 관리들이 빽빽하게 모여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저명한 스님을 보러 온 신도들까지 더해져 매우 혼잡한 광경이 연출됐다고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법현과 현장은 단순히 개인적 신앙을 위해 불교 성지를 방문하고자 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불경의 수집과 번역을 통해 조국의 불교 수준을 높인다는 사명을 지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시아 불교권의 통합을 이끈 인물들이었다. 내부지향적 속성이 강했던 중국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세계화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그림2 현장의 귀국 장면, 둔황 석굴의 두루마리 그림.
베네치아·바그다드 등 부를 쌓는 역할
그들이 찾아가는 궁극의 목적지는 메카의 대모스크에 있는 카바라는 성소였다. 정육면체 구조물인 카바는 키스와라는 검은 천으로 싸여 있다. 이슬람 교도들은 카바에 있는 신성한 ‘검은 돌’에 입을 맞추고 카바를 돌면서 경배를 했다.

그림3 이스칸다르 술탄의 모음집, 1410~1411년.
어느 종교권에서건 순례는 신 앞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신성한 신앙행위였다. 그러나 순례가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한 속세의 경제와 동떨어져 진행될 수는 없었다.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항구 도시들은 순례를 일종의 관광산업처럼 여기고 운송수단과 안내 서비스를 제공해 부를 쌓았다. 순례길에 위치한 도시들에는 먹거리와 옷가지,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이 가득했다. 어수룩한 순례객의 주머니를 노린 노상강도, 돌팔이 의사, 바가지 장사꾼도 많았다. 그러나 이런 일차적 경제효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순례길이 사람들의 가치관과 풍습, 지식과 정보를 유통시키는 채널로 기능했다는 점이다. 광대한 공간을 동질적 질서로 한데 묶는 일이야말로 순례자들이 의도치 않게 행한 역사적 역할이었다.
다시 그림1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생각해보자. 세계화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시간이 흐르자 산티아고 순례길은 종교적 색채가 옅어지면서 개인적 성찰의 길로 변모했다. 다시 한참을 지나 이 순례길은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제주 올레길이라는 형태로 재탄생했다. 그리고 다시 일본 규슈와 몽골의 올레길로 확장되고 있다. 참으로 변화무쌍한 진화과정이다.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세계화의 풍경들』『비주얼 경제사』『세계경제사 들어서기』 등 다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