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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주둔했던 용산기지, 근·현대사 해석하는 프리즘”

중앙선데이 2017.09.03 01:07 547호 11면 지면보기
용산기지에 빠져 사학자 된 한미연합사 해병
1948년 용산기지 미 7사단사령부 건물 전경. 일제가 조선군사령부로 쓰던 곳이다.

1948년 용산기지 미 7사단사령부 건물 전경. 일제가 조선군사령부로 쓰던 곳이다.

미 7사단 31, 32 보병연대 건물. 현재 용산기지 메인 포스트다.

미 7사단 31, 32 보병연대 건물. 현재 용산기지 메인 포스트다.

포병대 일대를 항공 촬영한 사진

포병대 일대를 항공 촬영한 사진

용산미군기지에 빠져 향토사학자가 된 한 해병이 있다. 김천수(39)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이다. 김 실장은 박사 학위가 없음에도 용산기지 역사 전문가로 꼽힌다. 그만큼 용산기지를 연구한 학자가 드물다. 언론에 보도되는 옛 용산기지 사진 대부분은 그 출처가 김 실장의 자료함이다. 그와 용산기지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한국외대 96학번으로 해병대 부사관으로 입대한 그는 2002년 용산기지에서 군사 유학시험을 치렀다. 시험장은 해방 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릴 당시 소련 대표단 숙소로 사용되던 현 주한미합동지원단 청사였다.

김천수 용산문화원 연구실장
5년간 용산서 근무하며 자료 수집

일제 1만4000여 세대 강제 이주
무덤 13만 기 파헤치고 기지 조성

조상이 걸었던 옛길, 만초천 남아
공원화 이전 역사 복원 공론화 필요

 
“건물 모양이 독특했어요. 미국도 일본도 그렇다고 한국도 아닌 특이한 분위기가 기지 내부 곳곳에 남아 있더라고요. 대학 때부터 용산기지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때 본격적으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어요.”
 
지난 1일 용산구청 10층에서 만난 김 실장이 들려준 용산기지와의 인연이다. 창 너머로 용산기지 사우스포스트가 내려다보였다. 2003년 6개월간 미국 군사 유학을 다녀온 그는 2009년부터 5년간 용산기지에 있는 한미연합사령부에서 근무했다. 지난해 해병대 전역과 함께 용산문화원에서 일하면서 지역사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김 실장은 용산기지를 ‘프리즘’에 비유했다. “한국 근현대 정치사는 물론이고 이태원 일대가 형성된 사회 및 문화사를 용산기지를 통해 읽을 수 있어요. 국내에서 이렇게 다양한 역사가 얽혀 있는 장소는 용산기지가 유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거대한 프리즘이라 할 수 있어요.”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 유리창 뒤로 용산기지가 보인다. 김경빈 기자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 유리창 뒤로 용산기지가 보인다. 김경빈 기자

어떻게 사료를 수집했나.
“용산기지에서 근무한 게 큰 도움이 됐어요. 미8군에는 군 역사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역사학자들도 일하고 있는데 그분들이 가지고 있는 기초자료가 많았습니다. 그분들과 교류하면서 용산기지 역사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었고 다양한 자료를 접할 수 있었어요. 다행히 옛 자료들은 군사기밀로 분류되지 않아 접근하기 어렵지 않았어요.”
 
용산기지에 대한 역사적 연구물이 부족하다.
“1980년대 무렵까지 군사정권이 이어지면서 용산기지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어요. 역사 연구가 이뤄지지 못했죠. 용산기지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이후라고 봅니다.”
 
용산기지는 언제 시작됐나.
“러일전쟁 이후 일제 제국주의가 확장되면서 기지도 만들어지기 시작했어요. 1906년부터 1913년까지 1차 기지 건설공사가 진행돼요. 대륙 침략의 후방 기지 역할을 했던 겁니다. 이후 1915년부터 1922년까지 2차 확장공사가 이뤄지고요.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켰어요. 당시 용산기지에 주둔하던 일본군 제20사단 병력이 파견돼 관동군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는 만주사변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용산기지에 만주사변 전병사자 충혼비를 세웁니다. 한국전쟁 이후 충혼비는 미8군 전몰자 기념비로 재활용됐는데 지금은 평택으로 옮겨졌어요.”
시설공병대 건물. 지붕에 공병대를 뜻하는 POST ENGINEER란 영문이 선명하다.

시설공병대 건물. 지붕에 공병대를 뜻하는 POST ENGINEER란 영문이 선명하다.

위수감옥과 헌병소대 막사와 수송반.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는 이곳에 수감됐다. [사진 미국 국립문서보관청]

위수감옥과 헌병소대 막사와 수송반.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는 이곳에 수감됐다. [사진 미국 국립문서보관청]

 
김 실장은 요즘 대한제국 무렵 용산기지 지역사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 7월에는 1906년 일제가 작성한 한국용산군용수용지명세도(韓國龍山軍用收容地明細圖)를 공개했다. 990만㎡(약 300만 평)에 이르는 용산군용지 면적과 경계선이 표시된 지도다. 일제 토지 수용이 이뤄지기 전 기지 주변 둔지미마을 등 옛 흔적도 들어 있다. 김 실장은 일본 아시아역사자료센터에서 수만 건의 자료를 조회하다 지도를 발견했다.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가 공개로 설정해 둔 문서였다. 그는 올해 연말 이와 관련된 책을 발간할 예정이다.
 
수용지명세도에 담긴 역사적 의미는 뭔가.
“용산기지가 외국군 주둔의 역사로 점철됐다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기지가 들어서기 전부터 용산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한이 담긴 장소라는 게 지도에 담겨 있어요. 일제가 기지를 조성하면서 1만4000여 가구가 강제이주해야 했고 파헤쳐진 무덤도 13만 기에 이를 정도예요. 당시 원주민 반발도 컸어요. 일제는 이런 내용을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고했는데 이 과정을 거치면서 수용 규모가 990만㎡에서 390만㎡(약 118만 평)로 줄었어요.”
 
옛 마을 흔적은 현재도 남아 있나.
“조상들이 매일같이 걸었던 옛길과 만초천 물길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도 이번에 확인됐어요. 용산공원을 조성하더라도 이런 역사성과 장소성이 반영돼야 합니다.”
 
일제가 왜 용산기지를 중시했나.
“용산기지는 조선총독부와 함께 조선 지배의 양날개 중 하나였어요. 조선총독부 총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7대 미나미 지로와 제8대 고이소 구니아키는 육군대장 출신으로 용산기지 조선군사령관을 거쳤고 훗날 총독에 올랐어요. 이는 일제 군사 통치를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예요. 그와 동시에 용산기지에서 읽을 수 있는 한민족의 아픈 역사이기도 하죠.”
 
김 실장은 2014년 『용산의 역사를 찾아서』라는 책을 용산구청과 함께 발간했다. 지난달에는 신주백 연세대 HK연구교수와 함께 미 국립문서보관청에서 용산기지 옛 사진과 각종 설계도 등 사료를 확보했다. 비용을 댄 서울시는 확보한 용산기지 옛 사진 일부를 다음달 24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시한다. 이후 용산구청과 서울시청에서 11월까지 전시회를 이어갈 예정이다. 신 교수는 “해방 직후 용산기지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사진으로 해방 이전 일본군의 마지막 시기를 온전히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용산기지 연구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은.
“해방 이후 정부 수립까지 이어진 미 군정시기에 대한 기록이에요. 존 하지 중장이 이끈 미 7사단은 1945년 9월 용산기지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기지를 접수해요. 그해 연말까지 기지 공사가 진행됐고 이후 미 군정사령부가 용산에 주둔합니다. 하지만 군정시기 용산기지의 변화와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물을 아직까지 찾지 못했어요. 그 시기는 아직도 거대한 빈 공간으로 남아 있어요. 그 점이 가장 아쉬워요.”
 
해방 후 용산기지는 어떻게 변화했나.
“미군이 군사고문단을 남겨 놓고 철수하자 한국군은 용산기지를 재활용해요. 김종필 전 총리는 용산기지 벙커에서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들었다고 해요.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도 용산기지에서 일했어요. 좌익활동이 확인되면서 군복을 벗어야 했는데 그 시절 군인이 아닌 문관으로 용산기지 벙커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휴전협정 체결 전인 1952년 연말부터 미군이 용산기지 보수공사를 시작했다는 새로운 사실도 이번 미 국립문서보관청 방문에서 확인했습니다. 당시 미군에도 용산기지가 그만큼 중요했다는 뜻이에요.”
 
기지 반환에 따른 공원화 과정에서 시민들의 관심이 토양 오염에 집중되는 것 같다.
“토양 오염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역사적 관점에서도 용산기지의 과거를 바라봐 주셨으면 합니다. 공원화 이전에 어떻게 역사를 복원할 것인지에 대한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기지 내 어떤 시설물을 남기고 또 없앨 것인지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미군이 최근 전몰자 기념비를 평택으로 옮겼고 이를 용산기지로 되가져와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용산기지는 한국의 역사이자 주한미군의 역사예요. 전몰자 기념비는 미군뿐만이 아니라 한국전쟁 참전 유엔군을 추모하는 기념비이기도 합니다. 한국에도 미군에도 중요한 문화재예요. 그런 점에서 용산으로 되돌리고 향후 보존방향을 한국과 미군이 함께 상의해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기헌 기자 emck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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