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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줴짜이 “마오 주석이 판한넨 사형 때리지 말라 지시”

중앙선데이 2017.09.03 01:00 547호 28면 지면보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44>
항일전쟁시절, 보위중국동맹을 이끌던 쑹칭링(오른쪽 넷째)과 랴오멍싱(오른쪽 다섯째). 오른쪽 첫째가 훗날 중공 국가 부주석 지명을 앞두고 사망한 랴오멍싱의 오빠 랴오청즈. 1938년 가을 홍콩.

항일전쟁시절, 보위중국동맹을 이끌던 쑹칭링(오른쪽 넷째)과 랴오멍싱(오른쪽 다섯째). 오른쪽 첫째가 훗날 중공 국가 부주석 지명을 앞두고 사망한 랴오멍싱의 오빠 랴오청즈. 1938년 가을 홍콩.

셰줴짜이(謝覺哉·사각재)는 장자의 풍이 넘치는 법조인이었다. 무슨 일이건 소홀히 넘기는 법이 없었다. 최고인민법원장이 된 후에도 조사와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961년 여름, 국가주석 류샤오치(劉少奇·유소기)에게 보낸, 각 지방법원의 문제점을 지적한 서신도 책상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우리끼리 처리해도 될 모순을, 적과의 모순이라도 되는 양 눈을 부라린다. 형량이 과하고 들쑥날쑥하다. 재판정은 인간의 도리를 설파하는 장소로 변해야 한다. 그러기엔 판사들의 태도가 조잡하고 불량하다. 법도 인간이 만든 것이다. 잘못된 법이 있기 마련이지만, 의견을 제시할 용기가 없다 보니,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모른다. 총기는 넘치지만, 질이 형편없는 인간으로 변해 간다. 법보다 재물에 충성하는 우경분자로 전락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이런 애들에게 재판 맡겼다간 나라가 절단 난다.”

“죽이지 않으면 공과 언젠가 밝혀져”
판한넨이 마오의 노여움 산 이유
저우언라이와 쑹칭링 외에는 몰라

 
판한넨(潘漢年·반한년) 재판만큼은 평소 셰줴짜이와 달랐다. 딩펀(정분·丁汾)과 펑수화(彭樹華·팽수화), 두 젊은 판사들의 조사와 연구를 품위 있게 깔아뭉갰다. 딩펀이 40여 분간 조사결과를 설명했다. 셰줴짜이는 듣기만 했다. 말꼬리 자르거나 질문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표정이 어두워졌다. 설명을 마친 판사들은 셰줴짜이의 의견과 지시를 기다렸다.
 
듣기를 마친 셰줴짜이는 목이 타는 것 같았다. 물 한 잔 마시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서의 부액(扶腋)을 뿌리치고 창가로 향했다. 뒷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판사들은 자리로 돌아온 노혁명가의 입을 주시했다.
 
셰줴짜이의 결론은 간단했다. “우리 최고인민법원은 판한넨 사건의 진상을 알 필요가 없다. 법률 수속만 밟아라.” 판사들은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셰줴짜이는 손자 달래는 할아버지 같았다. “역사책 많이 읽어라. 대접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당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남들은 알 수 없는 특별한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중요 단계마다 착오가 많았다. 계급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주의 사회도 피할 방법이 없다. 지도자가 정확한 노선을 견지하던 시기나 잘못된 노선을 견지하던 시기도 착오는 있기 마련이다. 판한넨은 중앙의 기밀을 다룬 사람이다. 마오쩌둥 주석이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총리 외에는 내막을 아는 사람이 없다. 마오 주석으로부터 사형은 때리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다. 죽이지 않으면, 그것으로 됐다. 판한넨에 관한 시비(是非)와 공과(功過) 언젠가 밝혀진다. 그건 우리 몫이 아니다. 우리는 기록만 철저히 보관하면 된다. 재판이 열리면 사실 심리도 적당히 넘어가라.”
 
셰줴짜이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판한넨이 마오쩌둥의 노여움을 산 이유를 아는 사람은 총리 저우언라이와 국부 쑨원(孫文·손문)의 부인 쑹칭링(宋慶齡·송경령)외에는 없었다. 저우언라이는 판한넨의 처지를 안타까워했지만 죽는 날까지 입을 닫았다.
 
쑹칭링은 그 반대였다. 한때 쑨원의 후계자였던 랴오중카이(廖仲愷·요중개)의 딸 랴오멍싱(廖夢醒·요몽성)에게 판한넨과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쑹칭링의 남동생 쑹즈원(宋子文·송자문) 사이에 있었던, 별것도 아니지만 복잡해진 일을 털어놨다.
 
최고인민법원장 시절(1959~65)의 셰줴짜이. 왼쪽은 부인 왕딩궈(王定國). [사진 김명호 제공]

최고인민법원장 시절(1959~65)의 셰줴짜이. 왼쪽은 부인 왕딩궈(王定國). [사진 김명호 제공]

항일전쟁 초기인 1937년 1월, 쑹칭링은 코민테른 중국지부 책임자 왕밍(王明·왕명)에게 보고를 겸한 편지를 보냈다. “3개월 전, 판한넨이 마오쩌둥 동지의 편지를 들고 왔다. 동생 쑹즈원에게 자금 지원을 부탁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2개월 후 판한넨에게 미화 5만불을 마오 동지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돈을 전달받은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에게만 출처를 얘기했다. 쑹즈원은 장제스의 처남이며 국민당 재정부장이었다. 소문나면 오해를 사고도 남을 일이었다.
 
며칠 후, 시안(西安)에서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의 동북군이 장제스를 감금했다. 항일전쟁을 위한 국·공합작을 요구했다. 쑹즈원은 난징(南京)과 시안을 오가며 사태를 해결했다.
 
국·공합작이 성사된 후 저우언라이가 쑹즈원을 만났다. “누님 편에 보내 준 돈 잘 받았다. 요긴한 곳에 썼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쑹즈원은 무슨 말인지 몰랐다.
 
쑹칭링이 마오쩌둥의 부탁을 받았을 무렵, 쑹씨 남매는 서먹서먹한 사이였다. 정견의 차이였다. 쑹칭링은 동생에게 돈 문제를 꺼내기 싫었다. 직접 만들었다. 은행은 노출되기가 쉬웠다. 집문서 들고 전당포를 찾아갔다. 쑨원 사망 후 각계에서 보내 온 위로금까지 합쳐 5만불을 겨우 마련했다.
 
국·공합작은 남매관계도 회복시켰다. 하루는 쑹즈원이 쑹칭링을 찾아왔다. “살다 보니, 별 이상한 소리 다 들었다. 저우언라이에게 내가 보내 준 돈 잘 받았다는 말 듣고 당황했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돈 한 푼 보낸 적이 없다. 돈 달라는 얘긴지 뭔지 분간이 안 간다.”
 
쑹칭링은 그런 일 있었느냐며 웃어 넘겼지만, 속으로는 판한넨이 입을 놀렸다며 발끈했다. 판한넨은 저우언라이의 직속이었다. 이런 일들을 셰줴짜이나 판사들은 알 턱이 없었다. 판한넨의 운명은 이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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