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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의 노후 준비 5년 만에 끝내기(23) 노후 비상금은 필요악] "노후 용돈, 내가 해결" 공개 조성 바람직

중앙일보 2017.09.03 00:02
규모 크면 의심받지만 적당하면 삶의 활력소 … 남자는 품위 유지, 여자는 생활 안정

“노후엔 아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딴주머니가 있어야해. 그거 만들어뒀어?”
 
“아니, 월급 타면 고스란히 아내한테 주는 판인데.”
 
“그러다 내 꼴 나면 어쩌려고. 딴주머니는 필요악이야. 미리 만들어 놓는 게 좋아.”
 
얼마 전 저녁식사 자리에서 한 지인이 건넨 이야기다. 그는 공기업 임원으로 있다가 2년 전 퇴직했다. 입사 후 승승장구하며 요직을 두루 거쳐 그런대로 직장생활을 행복하게 누린 편이었다. 하지만 퇴직하고 나니 하루아침에 현역시절의 풍족함은 온데 간데 없이 쪼들리는 신세가 됐다.
 
무엇보다 기초적인 품위 유지가 안 되는 게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내한테 한 달 용돈을 타다 쓰는데, 혼자 교통비와 점심값을 해결하는 정도였다. 친구나 후배들을 만나면 밥값·술값이 들어가는데, 턱없이 모자랐다. 임원까지 지낸 터라 이곳 저곳에서 청첩장이니, 부고니 사흘이 멀다고 날아왔다. “수입도 없는데 분수를 알아야 한다”며 잔소리를 하는 아내에게 용돈을 올려달라고 간청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한 달 용돈이 열흘도 안 돼 바닥나기 일쑤여서 웬만한 모임은 참석을 기피하게 됐다. 동네 문화센터와 도서관을 전전하며 하루를 때우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제야 퇴직 이후에 혼자 쓸 비상금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더라는 것이었다.
 
세상살이엔 예기치 않게 돈 쓸 일이 적지 않게 생긴다. 사람들이 개인적인 비상금이란 것을 만드는 이유다. 비상금은 재정형편이 어려울수록 한계효용이 커진다. 소득이 줄어드는 노후가 그렇다. 한계효용은 어떤 재화 또는 서비스의 추가분으로부터 얻는 효용이다. 가뭄 속 단비처럼 지갑이 얇아진 상황에선 비상금이 주는 만족감은 현역 때보다 클 수밖에 없다. 노후비상금은 부족한 용돈을 메우는 성격이 강하다. 없으면 불편하지만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꺼려진다. 있다고 한들 마음이 찜찜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한계효용 높은 노후 비상금
 
현역시절 누구나 한 번쯤 비상금을 놓고 해프닝을 겪은 경험이 있지 싶다. 조성 과정이 뭔가 떳떳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용도로 쓰기 때문이다. ‘비밀’ ‘배신’이란 단어와 연결되기도 한다. 딴 주머니란 부정적 이미지이기에 은닉의 문제도 있다. 아내의 카드 사용내역 추적으로 비상금 존재가 들통나면 가정파탄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부 갈등의 빌미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비상금의 필요성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너무 규모가 크면 의도를 의심받을 수 있지만 적당한 금액은 오히려 생활의 활력소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필요악인 셈이다.
 
어느 취업 포털이 20~60대 기혼 부부 200명에게 ‘배우자가 모르는 비자금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응답자의 26.5%가 ‘예’라고 답했다. 또 ‘배우자가 비자금을 갖고 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도 응답자의 62%가 ‘예’라고 답했고, 특히 나이가 들수록 비자금이 있으면 좋겠다는 응답 비율이 높아졌다.
 
그렇다면 비상금은 어떻게 조성할까? 교수라면 이런저런 회의나 세미나에 참석해 거마비를 받을 수 있고, 기업체로부터 프로젝트를 따 가욋돈을 벌 수 있다. 유리알 지갑인 일반 직장인도 기회는 많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특별상여금, 명절 떡값 등이 나온다. 한 달 용돈의 일부를 쓰지 않고 절약해 모을 수도 있다. 일주일에 커피 한 잔, 술자리 한 번만 줄여도 오랜 세월 쌓이면 적잖은 돈이 된다.
 
하지만 퇴직하면 직업을 불문하고 비상금 조성 기회가 사라져버린다. 그렇다고 돈 쓸 곳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퇴직 후에도 인간관계와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 특유의 분위기상 사회활동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어간다. 배우자 몰래 소비해야 할 데도 생긴다. 더구나 월급쟁이는 대개 퇴직하면 가정의 경제권이 부인에게 집중되는 경우가 많다. 부인과의 대화를 통해 비상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용돈을 받아 쓰는 남자의 생활은 팍팍하다. 후배에게 술 한잔 사기 쉽지 않고 꼭 챙겨야 할 경조사에도 소심해지게 된다. 아내한테 용돈 좀 올려달라고 했다가는 “나는 생활비 한 푼에도 벌벌 떨면서 사는데 돈도 못 버는 주제에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느냐”는 타박이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다 부부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고 갈등은 부부싸움으로 번지곤 한다.
 
이럴 때 아내 몰래 모아둔 비상금이 있다면 험악한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어쩌면 남자 노후생활의 품격은 비상금과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남자에겐 자유롭게 처분 가능한 돈이 어느 정도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게다가 비상금은 좌절에 빠지기 쉬운 노후에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퇴직 후 아내가 주는 용돈의 범위 내에서 알뜰살뜰 사는 남자도 많지만 앞의 공기업 임원을 지낸 지인처럼 금단현상에 시달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는 지금 재취업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만약 재취업에 성공하면 무슨 수를 쓰든 비상금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게 자신의 노후를 위해, 아내와의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딴주머니 모른 채 하는 게 좋아
 
하지만 재취업을 한다 해도 눈먼 돈을 찾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갈수록 길어지는 노후기간에 쓸 만한 자금을 조성하기도 어렵다. 결론은 현역 때 미리미리 준비하는 게 좋다는 말이다. 사전에 “노후에 쓸 용돈은 내 스스로 해결할 테니 매달 월급에서 얼마씩 저축하겠다”며 배우자에게 솔직히 양해를 구하는 방법이 가장 바람직하다. 비자금을 둘러싸고 부부가 티격태격하는 것은 조성과정을 비밀에 부치기 때문이다. 노후 가계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용돈을 재정 형편이 나은 현역 때 조금씩 준비하겠다니, 그것도 공개적으로, 아내는 웬만 하면 동의해줄 것이다.
 
노후에 비상금이 필요한 건 여성도 마찬가지다. 여성은 남성보다 평균 3~4년 더 오래 산다. 혼자 살아야 하는 기간이 더 긴 만큼 별도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꼭 독거생활 대비용이 아니라도 비상금이 있으면 남편과 자식, 주변에 당당해질 수 있다. 남편도 아내가 비상금 통장을 하나쯤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다. 하지만 여성은 비상금을 가지고 있다 해도 남편이나 자식이 긴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풀어놓는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남성이 품위유지와 여가, 자신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비상금을 쓰듯이 여성도 자신의 윤택한 노후를 위해 활용하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다.
 
부부 사이엔 비밀이 없어야 한다고 한다. 이는 돈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신뢰가 생명인 부부가 숨기는 돈이 있어선 안된다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살다 보면 세상은 그렇게 원칙대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어쩌면 배우자가 나 몰래 딴 주머니를 차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오늘 남편이나 아내가 집에 돌아오면 슬쩍 떠보는 게 어떨까. 혹시 딴 주머니를 차고 있지 않느냐고. 딱 잡아뗀다면 그렇게 믿어주는 게 현명하다. 혹 낌새를 눈치채더라도 굳이 들춰내려고 애쓰지 말자. 부부 사이에도 어항처럼 맑고 투명한 돈 관계를 유지하기란 진짜로 어렵다.
 
※ 필자는 중앙일보 재산리모델링센터 기획위원이다.
 
서명수 중앙일보 재산리모델링센터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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