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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27) 명종과 영의정들] 일할 여건 만들지 않은 명종 자리 보전에만 급급한 신하

중앙일보 2017.09.03 00:02
인품 훌륭했던 홍언필·심연원·상진, 훌륭한 재상이란 평가 못 받아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사진: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사진: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정승으로 세 조정을 섬기는 동안 한 번의 건의도 없었다. 논의할 적에는 ‘전하의 하교가 지당합니다’라는 말이 아니면 그저 다른 정승이 하는 대로 좇아갈 뿐이었다. 두려워하며 자리를 보존하는 데에 급급하였으니 ‘어디에다 쓰겠는가?’라는 비난에서 어찌 벗어날 수 있겠는가!”(명종4년 1월 28일).
 
“정승으로 있던 십 여 년 동안에 정사(政事)를 밝혀 돌본 바가 없었다. 두려워하고 머뭇거린 자취가 많다.”(명종13년 6월 19일).
 
“의논함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았고 오로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랐다. 을사년에 말한 것 중에는 권세를 가진 간신들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 많았다.”(명종19년 윤2월 24일).
 
이것은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홍언필(洪彦弼, 1476~1549)과 심연원(沈連源, 1491~1558) 그리고 상진(尙震, 1493~1564)에 대한 사관(史官)의 평가이다. 을사사화의 원흉으로 영의정에까지 올랐지만 갖은 전횡을 휘둘렀던 간신 윤원형과 이기, 그리고 명종 말엽부터 선조 초반기까지 영의정을 지내며 권력 교체기를 훌륭히 이끌었던 이준경을 제외한다면 바로 이 세 사람이 명종의 재위 기간을 대표한다.
 
바른 말 하지 않고 눈치만
그런데 위의 표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세 사람에 대한 평은 그다지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또한 바른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였으며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눈치를 보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 나라의 수상으로서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리만 지켰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세 사람이 함량 미달이었다거나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다. 인종 때에도 영의정을 지낸 바 있는 홍언필은 ‘겸손하고 청렴하여 매우 검소했다’고 전한다. 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자식 교육에 성공해 그의 아들 홍섬(洪暹)도 영의정에 올라 명망을 떨쳤다. 심연원은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의 조부로 ‘성품이 자상하고 따듯하며 마음가짐이 겸손했다’고 한다. 지리(地理)에 밝았으며 일처리가 뛰어났고 선비들을 보호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명종의 묘정에 배향된다. 상진 역시 ‘너그럽고 도량이 있었으며 침착하고 중후하여 남과 경쟁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재들을 아껴서 조야의 신망을 얻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들이 왜 ‘훌륭한 영의정’으로는 기억되지 못하고 있을까. 일차적인 책임은 용기가 부족한 데 있을 것이다. 홍언필은 을사사화에 공을 세웠다며 보익(保翼) 이등공신에 책봉되었고, 심연원은 추가로 삼등 공신에 봉해졌다. 을사사화는 명종의 외숙부 윤원형 중심의 소윤파가 인종의 외숙부 윤임 일파를 제거하면서 그 과정에 눈엣 가시로 여겼던 선비들을 함께 숙청한 사건인데, 이와 같이 의롭지 못한 일에 공로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두 사람이 을사사화에 개입한 것은 아니다.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안타까워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거기에 반대하지도 못했다. 목숨을 걸고 간언하거나 사화의 주동자들과 맞서지도 못했다. 형식적이지만 피해자들에 대한 심문 과정에도 참여한다. 용기를 내지 못해 침묵해버린 잘못이 있는 것이다.
 
물론 엄혹한 시대는 평온한 시대의 잣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 시대의 상황과 고통을 모르면서 왜 목숨을 걸지 못했느냐, 왜 싸우지 못했느냐고 질책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홍언필과 심연원이 자연인이었다면 이것은 당연히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두 사람이 영의정이었고 대신이었다는 점이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무를 다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러지 못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진의 경우는 좀 더 심한데 그는 윤원형·정순붕 등 소윤 일파와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정언각을 비호하고 정순붕이 자신에게 무례했음에도 그의 기분에 맞추어주었으며 이양의 환심을 사는 등 권세가에게 아첨했다는 비판을 받는다(명종19년 윤2월 24일).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실록에는 이런 일화도 있다. 그가 친구인 송순에게 “자네는 어찌하여 불우하고 침체되기가 이와 같은가?”라고 물으니 송순은 “내가 만약 목을 움츠리고서 바른 말을 하지 않았으면 벌써 정승의 지위를 얻었을 것이네”라고 답했다. 그러자 상진이 웃으며 “자네가 묵묵하여 말하지 않는 나를 비판하는 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네. 그러나 불평하는 말을 많이 하여 이리저리 귀양 다니는 것이 과연 무슨 맛이 있겠는가?”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여러 기록들로 볼 때 그가 어진 정승이었음에는 분명하나, 자신의 안전을 희생하면서까지 조정을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지는 않다.
 
재상의 간언에 귀 기울이지 않은 명조
그런데 이 세 사람의 용기가 부족한 것도 부족한 것이지만, 세 사람이 이 정도 수준의 영의정에 머물렀던 데에는 무엇보다 보스인 명종의 잘못이 크다. 세 사람은 모두 성격이 겸손하고 온화했다고 하는데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내성적인 경우가 많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고 척을 지지 않으려 하다 보니 우유부단하게 비춰지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보스가 보호막이 되어 주고 격려해주어야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외부 상황을 신경 쓰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뜻을 펼친다.
 
명종은 그러지 않았다. 흔히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의 기세에 눌려 모후가 죽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정왕후의 수렴첨정 기간이 끝나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수렴을 끝낸 후, 자신의 집안과 관련된 것이나 자신이 신봉한 불교에 관한 문제를 제외하고는 국정에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 명종이 중전의 외숙부 이량을 총애하고 중용하자 조정의 무게추가 대번 윤원형에서 이량으로 옮겨간 것만 봐도 그렇다. 충분하지는 못하더라도 명종에게는 자신의 정치를 펼칠 수 있는 힘이 있었고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명종은 재상들이 아닌 이량·심통원 등 외척들에게 연이어 힘을 실어줘 조정의 공적인 의사결정 체계를 무너뜨렸고, 재상들이 외척의 눈치를 보도록 만들어버렸다.
 
더욱이 명종은 평소 재상의 간언에 그다지 귀 기울이지도 않았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하면 화를 내거나 배척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반성하고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그저 알았다고 말하거나 완곡하게 거절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 보니 재상들도 현상을 유지할 뿐 무언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무릇 보스와 참모는 서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관계여야 한다. 참모는 보스가 훌륭한 보스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좌해야 하고, 보스는 참모가 자신의 역량을 남김없이 끌어낼 수 있도록 격려하고 이끌어주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설령 악을 행하지 않더라도, 나쁜 선택을 하지 않더라도 이처럼 어중간해져 버리는 것이다. 명종과 그의 영의정들처럼.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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