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헷갈리는 ‘신의칙’ … 법원 “중대한 경영 타격 없으면 불인정”

중앙일보 2017.09.01 02:02 종합 4면 지면보기
31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기아차 통상임금 소송 1심에서 재판부는 정기 상여금과 중식비 등을통상임금으로 인정했다. 재판에 참석했던 기아차 노조원들이 해산하기 전 박수를 치고 있다. [강정현 기자]

31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기아차 통상임금 소송 1심에서 재판부는 정기 상여금과 중식비 등을통상임금으로 인정했다. 재판에 참석했던 기아차 노조원들이 해산하기 전 박수를 치고 있다. [강정현 기자]

법원은 31일 기아자동차가 법으로 정해진 통상임금 기준에 따라 산정되는 임금을 추가로 지급한다고 해서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2013년 대법원은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회사가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을 이유로 추가 임금 지급을 거부할 수 있는 조건으로 제시했다.
 

금호타이어 등 과거 신의칙 인정 땐
적자·부채로 회사 위태 상황 고려

학계 “기업, 현재보다 미래 대비 필요”
“현재 근로자 이익 더 중요”의견 갈려
기아차 “금액 감내 못 해” 항소 의사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1부(부장 권혁중)는 이날 기아차 통상임금 사건 선고 재판에서 “노조가 청구한 급여 중 정기 상여금과 중식대가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이 확정되면 회사는 3년치 소급분인 총 4223억원(지연 이자 포함)을 근로자들에게 지급해야 한다.
 
정기 상여금과 중식비가 퇴직금·초과근로수당 산정의 기준이 되는 통상임금에 포함되는지는 노사 양측의 이견이 재판 과정에서 크지 않았다. 재판부도 이 급여들이 통상임금 인정 요건인 ‘정기성·일률성·고정성’을 충족한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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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의 핵심 쟁점은 근로자들의 청구가 신의칙 위반에 해당하느냐였다. 신의칙은 민법 2조 1항에 ‘권리 행사와 의무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해야 한다’고 표현된 민사법의 대원칙이다. 계약의 당사자는 서로 이익을 배려하고 형평성에 어긋나거나 신뢰를 저버리면서까지 권리를 행사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3년 갑을오토텍 통상임금 사건에서 신의칙 적용에 관한 새로운 법리를 제시했다. 계약 당사자 사이의 합의가 강제성 있는 법률을 위반하는 내용일 경우에는 당사자 한쪽이 일방적으로 합의를 파기해도 신의칙 위반이 아니라는 게 민사 분쟁에 관한 그동안의 판례였다. 그런데 대법원은 이때 통상임금에 관해선 달리 판단했다. 정기 상여금을 통상임금 산정에서 배제하기로 한 노사 합의는 근로기준법 위반이라 효력이 없지만 그 합의를 깨는 주장이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재정 부담으로 회사에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이 초래되거나 존립이 위태롭게 된다면 신의성실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대법원이 이 기준을 제시한 뒤 하급심에선 회사의 신의칙 주장이 인정된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이미 적자 상태이거나 부채비율이 높아 경영 위기가 도래한 기업과 관련된 재판이었다.
 
앞서 광주고법 민사1부(부장 구회근)는 8월 18일 금호타이어 사건에서 사측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해 6월 기준으로 금호타이어의 부채가 4조원에 달해 자본총액 대비 약 147%에 이른 점 등 악화된 경영 상황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조선업계 불황으로 경영이 어려워진 현대중공업의 신의칙 주장도 지난해 항소심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날 재판부는 매출 실적, 부채비율(2015년 기준 63.7%) 등을 고려할 때 기아차가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이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사측은) 매년 지속적으로 당기순이익을 거뒀고 2008~2016년 매년 근로자 모두에게 성과급을 지급했다. 성과급 합계액은 이번 사건에서 인용된 원금보다 많다”고 설명했다. 사측은 “지난 상반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44% 급락했고 영업이익률도 3%로 하락했다”고 항변했지만 재판부를 설득하지 못했다.
 
재판부는 “회사가 인건비 절감을 위해 생산시설을 해외로 이전한다고 가정할 경우 한국 경제 전체에 중대한 위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가정적인 결과를 예측해 근로기준법이 보장하는 정당한 권리 행사를 제한하는 것을 타당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경영상 어려움’에 대한 재판부 판단을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이 전략을 짤 때 5년 이상을 내다보는데 미래의 위험을 배제하고 현 상황만 고려한 것은 근시안적 판단이다”고 지적했다. 노상헌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위기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 것은 거의 모든 기업의 현실이다. 미래의 경영 위기보다는 현재 근로자의 권리가 중요하다고 본 판결은 합당하다”고 말했다.
 
기아차는 선고 직후 “현 경영 상황은 판결 금액 자체를 감내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신의칙이 적용되지 않은 점은 매우 유감이다”며 항소 의사를 밝혔다.
 
김선미·문현경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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