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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의 월드컵 현장 분석] 10명 뛰고도 안 흔들린 이란 … 한국, 그 냉정함 기억하라

중앙일보 2017.09.01 01:00 경제 7면 지면보기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 이란과의 경기가 열린 서울월드컵경기장에는 역대 아홉 번째로 많은 6만3124명의 팬들이 몰려들었다. [연합뉴스]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 이란과의 경기가 열린 서울월드컵경기장에는 역대 아홉 번째로 많은 6만3124명의 팬들이 몰려들었다. [연합뉴스]

스포츠에서 정신력이란 무엇인가. 죽기살기로 열심히 뛰는 것도, 거칠게 상대를 압박하는 것만도 아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경기장에서 마지막까지 쏟아내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정확히 알고 냉정하게 대처하는 것도 정신력이다.
 

붉은 티셔츠 입은 6만 관중 응원 속
의욕 과잉, 성급한 플레이 속출
‘기성용 연상’ 김민재 활약은 위안
우즈베크전 답은 얼음 같은 집중력

8월 마지막날,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이란의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지역 A조 최종예선 9차전. 벼랑 끝에 몰린 한국 선수들은 정말 열심히 싸웠다. 그러나 열심히는 했으나 효율적으로 싸우지는 못했다.
 
우리 선수들은 정신적으로 단단히 무장돼 있었다. 최근 대표팀의 무기력한 플레이로 ‘태극전사’에 대한 비난의 수위가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한국 축구를 지키기 위해 6만 명이 서울월드컵경기장을 꽉 채웠다. 전광판에는 ‘상암 불지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찍혔다. 대한축구협회가 나눠준 붉은 티셔츠를 입은 6만 관중이 일어서서 일제히 클래퍼(응원용 종이)를 흔들자 경기장은 마치 불지옥처럼 일렁거렸다.
 
선수들은 불덩이를 가슴에 품었지만 얼음처럼 냉정해야 했다. 그러나 대부분 의욕 과잉이었다. 최전방의 황희찬(21·잘츠부르크)은 맹렬하게 뛰며 이란 수비수들과 부닥쳤지만 실속이 없었다. 수비에서 공격으로 연결하는 ‘빌드 업’ 과정은 단순했다. 볼 간수 능력이 뛰어난 구자철(28·아우구스부르크)을 거치지 않아 좌우 윙어 손흥민(25·토트넘)과 이재성(25·전북)은 전반에 볼을 몇 번 터치해 보지 못했다.
 
수비에서도 성급한 플레이가 이어졌다. 주장이자 중앙수비수인 김영권(27·광저우 헝다)은 세 차례 걷어내기 실수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순간을 맞아야 했다. 오른쪽 풀백 최철순(30·전북)은 원래 상대를 향해 한번에 몸을 던지는 스타일인데 이날도 그런 플레이가 몇 차례 나왔다. 이는 투지 있게 보일지는 몰라도 상대 공격수가 한 번 페인트 모션을 하면 여지없이 중심을 잃거나 파울을 하게 되는 위험한 동작이다. 최철순은 결국 전반 39분에 위험지역이 아닌 곳에서 거친 태클로 경고를 받았다.
 
3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9차전 한국 대 이란 경기.   김민재가 골문 앞에서 공중볼을 다투고 있다. [연합뉴스]

3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9차전 한국 대 이란 경기. 김민재가 골문 앞에서 공중볼을 다투고 있다. [연합뉴스]

오히려 이날 A매치 데뷔전을 치른 중앙수비수 김민재(21·전북)가 마치 백전노장처럼 여유 있는 플레이를 했다. 위험한 순간에도 침착하게 공을 끊어냈고, 전방으로 한 방에 찔러주는 패스는 ‘패스 마스터’ 기성용을 연상케 했다. 전반 19분 프리킥 찬스에서는 큰 키(1m89㎝)를 이용한 헤딩 패스로 장현수(26·FC 도쿄)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결국 김민재는 후반 6분 사에드 에자톨라히의 퇴장을 이끌어냈다.
 
수적 우위를 확보한 한국은 맹렬하게 밀어붙였다. 그러나 경기장을 넓게 쓰면서 한 명이 빠진 이란 수비진을 흔들 플레이는 나오지 않았다. 우당탕탕 번개는 요란하게 쳤지만 정작 시원한 빗줄기는 내리지 않는 형국이었다.
 
반면 이란은 역시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A조 8경기에서 무패(6승2무) 무실점으로 러시아 월드컵 행을 확정한 팀 다웠다. 한 명이 퇴장당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들만의 선 굵은 플레이를 펼쳤다. 간결하면서도 늘 상대 진영을 향하는 모습에서는 오랜 기간 한 지도자 밑에서 다진 조직력이 풍겨나왔다.
 
후반 27분 이재성이 빠지고 1m96㎝의 장신 김신욱(29·전북)이 들어갔다. 그러나 김신욱의 머리를 향한 정확한 크로스를 올리기에는 우리 공격 전개가 너무 무질서했다.
 
축구대표팀 이동국은 후반 43분에야 교체출전했다. 뭔가를 보여주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연합뉴스]

축구대표팀 이동국은 후반 43분에야 교체출전했다. 뭔가를 보여주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연합뉴스]

후반 종료 2분을 남기고 드디어 백전노장 이동국(38·전북)이 투입됐다. 그러나 이동국이 뭔가를 보여주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후반 추가시간 이동국이 날린 슈팅은 허무하게 골문을 벗어났다. 경기 종료 직전 손흥민이 페널티지역 안에서 수비수 대여섯 명을 몰고다닌 드리블도 골로 연결되지 않았다.
 
결국 경기는 0-0 무승부로 끝났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6만3124명의 관중은 아쉬움을 가득 안고 돌아서야 했다. 그러나 더 큰 짐은 한국 축구대표팀과 신태용 감독에게 지워졌다. 열광적인 홈 팬들의 응원과 후반 수적 우위에도 한국은 성과를 만들지 못했다.
 
5일 적지인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반드시 이겨야 러시아 월드컵에 갈 수 있다. 이제 정말 정신력이 필요할 때다. 의욕만 갖고 덤벼드는 실속 없는 정신력이 아니라, 끝까지 냉정하게 집중하는 정신력 말이다. 케이로스 감독이 이끄는 이란 선수들이 서울에서 보여준 게 바로 그것이었다.
 
정영재 기자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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