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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view &] 시대를 너무 앞선 소득주도 성장론

중앙일보 2017.08.31 01:00 경제 9면 지면보기
정경민 기획조정2담당

정경민 기획조정2담당

부동산 값이 치솟으면 너도나도 대출을 받아 집을 산다. 차입자는 세 종류로 나뉜다. 첫째는 집에서 나오는 월세로 이자는 물론 원금까지 갚아나갈 수 있는 ‘헤지’ 차입자다. 둘째는 ‘투기’ 차입자다. 원금은 못 갚지만 이자는 감당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원금은 물론 이자도 갚아나갈 능력이 없는 ‘폰지’ 차입자도 등장한다. 대출 돌려 막기로 ‘폭탄’을 돌리는 차입자다. 부동산 값이 뜀박질할 땐 은행도 폰지 차입자에게 돈을 막 퍼준다. 어느 순간 은행은 폰지 차입자가 너무 많다는 걸 눈치 챈다. 폰지 차입자의 집을 차압한다. 시장엔 매물이 나온다. 포물선을 그리며 오르던 집값이 정점에서 멈춘다. 놀란 은행은 투기 차입자 대출까지 회수한다. 급매물이 쏟아지며 집값이 추락한다. 당황한 은행이 헤지 차입자의 대출마저 손댈 때 시장은 공황 상태에 빠진다.
 

시장 불신 포스트 케인지언이 뿌리
알파고 로봇이 생산 도맡지 않는 한
공급 무시한 성장론 있을 수 없어
기업 떠나가면 최저임금도 도루묵

2008년 미국에서 터진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를 정물화처럼 묘사한 설명이다. 한데 이 이론이 나온 건 30년 전이다. 1996년 타계한 미국 경제학자 하이먼 민스키가 주창한 ‘금융 불안정성 가설(Financial Instability Hypothesis)’이다. 세계 최대 채권회사 핌코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였던 폴 맥컬리가 98년 러시아 외환위기를 설명하면서 주창자의 이름을 따 ‘민스키 모멘트’란 신조어를 만들었다. 천정부지로 치솟던 집값이 정점에 이르는 순간을 말한다. 당대엔 경제학계의 이단아로 2류 취급을 당했던 민스키가 요즘 한국에서 부활했다. 민스키는 이른바 ‘포스트 케인지언’ 학파의 거두로 꼽힌다. 30년대 대공황 당시 미국의 뉴딜 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던 경제학자 케인스를 과격하게 계승한 학파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론’의 이론적 뿌리가 포스트 케인지언이다.
 
민스키를 비롯한 포스트 케인지언은 시장을 믿지 않는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개뿔이란 거다. 시장경제는 가만히 놔두면 외부 충격이 아니라 시장참여자의 투기적 속성 때문에 주기적으로 공황을 맞는다고 본다. 이를 막기 위해선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 당시엔 ‘변방의 북소리’로 치부됐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후 선견지명으로 재평가 됐다. 소득주도 성장론도 시장에 대한 불신을 바탕에 깔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면 규제가 사라지고 세계화가 진전될수록 시장은 효율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시장이 자원을 적재적소에 배분하면 경제는 성장해야 마땅하다. 성장의 과실은 낙수효과에 의해 모두에게 고르게 분배된다.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이 신봉하는 성장론이다.
 
그러나 규제 혁파와 세계화라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는 부익부빈익빈과 세계적 성장 정체였다는 게 포스트 케인지언의 진단이다.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갈수록 줄었고 이로 인해 소비가 위축돼 성장이 한계에 부닥쳤다는 거다. 민스크 모멘트가 설명하는 금융시장처럼 경제도 자유방임 하면 필연적으로 수요 부족을 야기해 성장을 제약한다는 얘기다. 이를 타개하자면 정부가 나서서 노동자의 몫을 늘려주는 정책을 펴야 한다. 2012년 국제노동기구((ILO)가 제기한 ‘임금주도 성장론’이다. 소득주도 성장론은 자영업자가 많은 한국 상황을 감안해 임금을 소득으로 바꿨을 뿐 골격은 같다. 최저임금 1만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기초연금 인상, 골목상권 지키기 등 그동안 문재인 정부가 쏟아낸 정책이 나온 맥락이다. 내년 예산안에 ‘큰 정부’ 포석이 들어간 것도 자연스런 수순이다.
 
이쯤 되면 앞으로 어떤 정책이 나올지도 그림이 그려진다. 포스트 케인지언 메뉴판에선 규제를 혁파해 기업이 맘껏 뛰게 하자는 주문은 구색 맞추기 사이드 메뉴는 몰라도 메인 메뉴에선 찾기 어렵다. 어쩌면 포스트 케인지언은 시대를 너무 앞서간 건지도 모른다. 알파고 로봇이 인간을 대신해 생산을 도맡을 4차 산업혁명의 절정기 땐 공급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성장은 수요의 함수가 된다. 그러나 2017년 대한민국은 그런 세상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기업이 외국으로 줄줄이 떠나 일자리가 사라지면 최저임금을 아무리 올린들 말짱 도루묵 아닌가.
 
정경민 기획조정2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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