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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의 시시각각] 위안부 합의는 깨야 하나

중앙일보 2017.08.23 02:30 종합 30면 지면보기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국민 정서를 거스르는 정치적 판단은 저주받아 마땅한가. 일본 대중문화 개방 논의가 고개를 들던 1996년, 여론은 싸늘했다. 한 여론조사 결과 찬성은 25.5%에 그친 반면 반대는 두 배 이상인 52.5%였다. “일본 저질문화가 몰려들 것”이라는 게 주된 우려였다. 그런데도 1998년 정부는 문호개방을 단행한다. 김대중 대통령 때 얘기다.
 

피해자 할머니 다수가 보상금 수령
기존 합의 토대로 보완이 바람직해

결과는 어땠나. 한류가 일본 열도를 휩쓸었지만 만화를 뺀 일본 대중문화는 이 땅에 발도 못 붙였다.
 
요즘 2년 전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을사늑약에 버금가는 반민족행위로 매도되는 분위기다. 폐기 운동이 곳곳에서 벌어져 60% 안팎이던 재협상 찬성 여론은 85%까지 치솟았다.
 
본인들 의사도 묻지 않고 합의가 이뤄진 건 명백한 잘못이다. 지난 21일 문재인 대통령이 한일의원연맹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피해 할머니 다수가 합의 내용에 반대하는 것처럼 몰고 가는 것도 사실 오도일 수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6월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위안부 합의는 한국민들이 정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특히 위안부 할머니들이 거부한다”고 했다.
 
과연 그런가. 합의 이행을 위해 세워진 화해·치유재단이란 게 있다. 잘 안 알려졌지만, 그간 접촉한 할머니 47명 중 36명이 위로금 1억원을 받거나 받기로 했다는 게 재단 측 설명이다. 또 1인당 평균 네 번씩 수용 의사를 확인했으며 때로는 강요·회유에 의한 게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녹화까지 했다고 한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측은 "정확한 합의 내용을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은 채 돈을 받도록 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피해자 다수가 합의를 거부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옛 정권 작품일지언정 외교적 합의를 뒤집으려는 것도 큰 문제다. 나중에 새 타협안을 끌어낼 때 “이번엔 깨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믿나”라고 물어오면 어쩔 건가.
 
합의가 이뤄졌던 2015년 말에는 “한·일 관계 개선이 시급하다”는 게 여론의 대세였다. 당시 한·일 관계에 대해 한국인의 67.2%, 일본인의 67.8%가 “바람직하지 않고 개선돼야 한다”고 답했다. 아울러 평균 90세인 피해자 본인이 혜택을 누리려면 하루빨리 해결책이 나와야 한다는 시급성도 합의를 재촉했다.
 
이런 터라 신속한 한·일 관계 개선 및 피해자 보상, 그리고 국민 100%가 만족할 일본 측 사과 및 조치라는 두 개의 선택지 중 전자를 택했다고 비난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20세기 최고의 법학자인 한스 켈젠은 이렇게 지적했다. “두 가치가 충돌할 때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는 합리적 인식으로 결정할 수 없다”고. 상반된 가치가 엇갈릴 때는 무엇이 정의인지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는 얘기다.
 
위안부 합의에 태생적 결함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완전히 없던 걸로 할 것인가는 다른 얘기다. 한·일 관계 전문가들은 “지금 분위기하에선 더 나은 해결책을 끌어내긴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물론 재협상 목소리가 커지는 데는 아베 정권 책임도 크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부터 사죄의 진정성을 못 느끼게 한다. 지난해 10월 일본 국회에서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죄 편지를 보낼 생각이냐는 질문이 나오자 “털끝만큼도 없다”고 한 게 단적인 예다. 그러니 기존 합의를 토대로 총리의 사죄 편지 전달 등 보완책을 곁들이는 게 바람직하다. 북한과 핵미사일 문제로 대치 중인 상황에서 비상 시 지원 기지가 될 일본과 협력하기는커녕 전선(戰線)을 형성하는 것처럼 비이성적인 일도 없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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