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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지금이 갈라파고스형 노동신약 시험할 때인가

중앙일보 2017.08.21 02:22 종합 28면 지면보기
김기찬 논설위원·고용노동선임기자

김기찬 논설위원·고용노동선임기자

1992년 7월 후지쓰의 세키자와 사장은 사보를 통해 이렇게 선언했다. “창조적 일의 평가는 시간을 얼마나 들이는가가 아니라 성과를 얼마나 냈는지를 따지는 것이다.” 그로부터 5개월 뒤 발간된 사보엔 세키자와 사장과 와타나베 노조위원장의 대담이 실렸다. 와타나베 위원장은 “부가가치의 구조가 조립에서 지적 생산성, 두뇌 노동으로 전환하고 있다. 노동시간이 아니라 노동의 질이 요구되는 시대에 미래의 이상적인 모습을 반드시 회사가 검토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93년 1월 성과형 임금체계가 도입됐다.
 

겉보기에 화려한 정책, 핸디캡으로 작용할 공산 커
경제엔 편이 없다 … 성장 날개에 힘 싣는 정책 필요

이런 움직임은 90년대 초 대부분 일본 기업에서 나타났다. 일본 노동정책연구연수기구의 스즈키 박사는 “기업이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市場)이 인사를 하는 패러다임으로 바뀐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장의 사인(sign)을 조직 내부로 연결한다는 얘기다.
 
산업지형이 급속하게 변하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일자리도 그 양태나 질이 달라졌다. 직업의 명멸은 순식간이다.
 
미국 워싱턴의 진보정책연구소 수석이코노미스트인 마이클 맨델은 “아마존 같은 전자상거래 업체의 등장으로 전통적 소매업 일자리는 줄어들지 모르지만 온라인에 기반한 주문센터 구축과 물류창고 증가로 일자리는 더 늘어난다”고 분석했다. 2007년 12월에서 2017년 5월까지 전자상거래 산업은 미국에서 39만7000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전통 소매업에서 사라진 일자리는 7만6000개였다. 새 일자리는 임금도 높았다. 교육 수준이 비슷한 경우 전자상거래 관련 일자리가 전통 소매업보다 30% 정도 높은 임금을 제공했다.
 
결국 좋은 일자리는 기업이 얼마나 혁신을 하느냐에 달렸다. 일자리만 느는 게 아니라 근로자의 호주머니도 두둑해진다. 이보다 확실한 노동존중 사회가 있을까.
 
한데 우리의 노동존중 사회는 좀 다른 것 같다. 노동정책이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신약 처방으로 흐르고 있어서다. 고용시장이 신약 시험장이 됐다. 시장 주도가 아니라 정부 주도다.
 
노동존중 사회는 일한 성과에 따라 제대로 대우받는 사회일 게다. 그러려면 임금체계를 바꾸는 게 맞다. 그런데 공공기관의 성과연봉제를 아예 폐지하고, 호봉제로 도돌이표를 그렸다. 최저임금을 확 올린 뒤 열병이 도진 영세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에게 돈을 뿌려 입막음을 한다. 심지어 근로자의 월급을 낱낱이 공개하는 임금분포공시제를 도입하려 한다. 시장 자율의 기본 토대인 임금까지 정부의 통제하에 두려는 발상이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안전업무는 아예 도급을 금지해 대기업이 직접 수행하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전문 안전업체의 설자리가 없어진다. 강소기업을 키울 업종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는 셈이다.
 
글로벌 시장의 사인(sign)과 딴판이다. 고립을 자초하는 갈라파고스형 정책에 다름 아니다. 이런 걸 계속 내놓는 이유가 뭘까. 지난 대선과 총선 공약집엔 “노조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했다. 경영계의 못된 습성을 염두에 둔 듯하다. 사실 경제단체가 대기업의 갑질로 자영업자가 고통 받을 때 자정운동이나마 벌인 적이 있던가. 그래 놓고 최저임금을 두고 ‘자영업자 보호’ 운운하는 걸 보면 뻔뻔하다.
 
이런 부조리를 모르는 건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부 정책은 균형감이 있어야 한다. 경제에는 편이 없다. 휘발성 강한 정책을 마구잡이 시험해서는 곤란한 이유다. 잘못하면 다 태운다.
 
당장 쓰기에 좋고, 입맛에 맞다고 몸에 좋은 것은 아니다. 글로벌 시장에 맹수가 득실거리는데 핸디캡이 추가되면 어떻게 될까. 화려하긴 해도 날지 못하는 공작이나 큰 몸집으로 위협적이긴 해도 못 나는 타조와 다를 바 없다.
 
지금은 날개를 튼튼하게 할 때다. 노동개혁은 고통스러워도 없어선 안 될 날개다. 지금 같이 살면 좋은 사람보다 앞으로 없으면 안 될 사람과 결혼하는 게 이치에 맞다. 정책이라고 다를까.
 
김기찬 논설위원·고용노동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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