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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방송 외주 생태계 개선, 지금 아니면 답 없다

중앙일보 2017.08.21 02:21 종합 29면 지면보기
노진호문화부 기자

노진호문화부 기자

빠듯한 예산에 쫓기며 EBS 다큐를 제작하던 두 독립PD(박환성·김광일)가 지난달 남아공에서 교통사고로 숨진 사건 이후 방송사 불공정 관행에 대한 관심이 높다.
 
주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만드는 독립제작자(독립PD·독립제작사)들을 만나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내가 누군지 알려지면 일 다 끊긴다”는 우려였다. 독립제작자들은 대화 중간중간 거듭 익명 보장을 확인했다. 그만큼 방송사와 독립제작자 사이의 ‘갑을 관계’는 뚜렷했다.
 
방송사의 외주 제작 의무편성비율이 도입된 건 1991년이다. 방송 다양성 확보와 프로그램 수준 향상이 목적이었다. 이 제도에 따라 각 방송사는 정해진 비율만큼 의무적으로 외주 제작 프로그램을 편성해 왔다.
 
하지만 결과는 목표와 반대로 갔다. 방송사들이 우월적 지위를 활용해 외주 제작비를 낮게 책정하거나 외주사들의 권리를 빼앗아 가면서 방송 시장의 질을 떨어뜨려 왔다.
 
16일 한국독립PD협회가 개최한 ‘방송사 불공정 청산 결의대회’ 모습. [사진 한국독립PD협회]

16일 한국독립PD협회가 개최한 ‘방송사 불공정 청산 결의대회’ 모습. [사진 한국독립PD협회]

한 독립PD는 올해 작성된 외주 계약서를 보여줬다. 그에 따르면 이 독립PD는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약 8200만원의 협찬(수수료 제외)을 따냈다. 하지만 실제 제작비로 쓴 돈은 5800만원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방송사에 ‘전파 사용료’ 명목으로 지불해야 했다. 방송사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프로그램 한 편과 2400만원을 챙겼다.
 
2차 판권 등 사후 권리에 관한 계약서 규정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독립제작자의 권리에 대해 “방송사 권리를 제외한 나머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해놓고, 방송사 권리는 “모든 권리”라고 했다. 독립제작자는 사실상 아무런 사후 권리가 없다.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방송사들은 상호 협의에 따른 계약이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또 다른 독립PD는 “계약은 협상이 가능해야 하는데, 우리는 동의만 해야 했다”고 말했다.
 
PD 사망 사건을 계기로 ‘을’들이 비로소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건 그나마 다행스럽다. 한국독립PD협회는 16일 방송사 불공정 행위 청산 결의대회를 열었다.
 
이번에 외주 생태계를 바로잡지 못하면, 을들은 다시 숨을 수밖에 없다. 방송 시장 왜곡은 심화될 게 뻔하다. 외주 제작 계약의 가이드라인을 정하는 정도로는 안 된다.
 
외주 제도를 전면 재검토하고, 방송사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좋은 방송을 볼 시청자의 권리가 걸린 문제다.
 
노진호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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