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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칼럼] 우리 안의 레드라인

중앙일보 2017.08.21 02:09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레드라인’이 시끄럽다. 17일 문재인 대통령의 기자회견. 그는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완성하고, 거기에 핵탄두를 탑재해 무기화하는 것”이 레드라인이라고 말했다. 좌우 모두 걱정이다. 걱정하는 내용은 전혀 다르다.
 

대통령 레드라인 좌우 모두 걱정
스스로 발목 잡아 강경책 몰릴까
왜 우리 아닌 미국 안전이냐
중요한 건 우리 안의 이견 해소
미국 설득해 공조하지 않고는
북한 움직일 협상력 갖기 어려워

진보 진영은 스스로 발목을 잡게 될까 우려한다. ICBM에 핵탄두를 장착하는 것은 머지않았다. 북한은 이미 성공했다고 주장한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군사행동은 아니라도 보수 강경파의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북한 핵 개발에 대해 마음속으로 수많은 레드라인을 그어 왔다. 플루토늄 추출, 우라늄 농축, 기폭 실험, 핵폭발 실험…. 그 뒤에도 핵실험을 지켜보면서 수없이 경고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다시 그다음 선을 그었다.
 
미사일에는 더욱 무감각했다. 일본이, 괌·알래스카가 사정권에 들어갔다며 남의 일처럼 지켜봤다. 일본이나 미국이 사정권에 들어가는 것은 동맹 전략에 절대 변수다. 합종과 연횡이 왜 중요한가.
 
‘레드라인’을 공개하고 나면 물러설 수 없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12년 시리아의 화학무기 사용에 레드라인을 그었다가 곤욕을 치렀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으로부터 “그 레드라인은 휘발성 잉크로 그은 모양”이란 조롱을 들었다.
 
보수 진영은 왜 ‘ICBM에 핵무기 탑재냐’고 불만이다. 노동미사일만으로 남한 전역이 사정권이다. ICBM이 위협하는 건 미국이다. 미국도 아닌데 왜 그렇게 물러서 긋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느슨한 레드라인 제시는 그 이전의 도발은 용납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고 비난한다.
 
내 패를 다 보여주면 도박에서 진다. 협상력이 떨어진다. 곧바로 ‘경고의 의미’라고 물러섰으니 패만 까고 위협은 주지 못하는 꼴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주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전략가를 해임했다. “미국에 군사적 해법은 없다” “북핵 동결과 주한미군 철수 교환”을 주장한 때문이다. 미국에서 많이 거론된 아이디어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도 비슷한 제안을 했다. 배넌이 민간 전문가라면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고위 관료는 다르다. 협상 카드를 까는 게 된다.
 
말실수다. 강조해서 경고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가는 게 옳다. 말꼬리 잡아 봐야 북한만 웃는다. 정작 걱정할 문제는 우리 안에 있다. 우리 안에 그어진 또 다른 의미의 레드라인, 갈등 선이다. 문 대통령은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은 대한민국만이 결정할 수 있고, 누구도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 군사행동을 결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북한이 우리에게 물어볼 리 없으니 미국을 겨냥한 말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화염과 분노’ 발언을 견제한 것이다. 더구나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과 비슷한 발언을 한 배넌을 해임했다. 한·미 공조가 불안할 수밖에 없다. 내놓고 부닥치는 건 비공개 조율이 어렵다는 뜻이다.
 
문 대통령은 18일 “김대중(DJ)의 길을 따라 남북이 다시 만나고 희망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DJ만큼 현실주의자도 없다. “대중보다 반 발짝만 앞서가야 한다”는 그의 말대로다. 교조적이면 안 된다. 상황에 맞춰 탄력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이 분명했다.
 
그는 대북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매우 신중했다.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미국을 설득했다. 정부뿐 아니다. 학자들까지 만나 열심히 자신의 생각을 퍼뜨렸다. 국내에서도 우화(寓話)까지 인용해 대중의 눈높이로 설득했다. 보수 학자들의 도움도 받았다.
 
그것이 대북 협상력이 되었다. 이제 그때보다 사정은 더 어려워졌다. 핵과 미사일은 저만치 달아났다. 우리가 북한에 줄 수 있는 게 없다. 돈? 안전? 유엔 안보리 제재로 돈길이 막혔다.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은 우리와 다른 체급이라고 생각한다.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말이 무색하다. 한·미 간 이견이 커질수록 미국의 군사행동을 막아준다는 약속은 힘이 빠진다.
 
남은 것은 중국. 중국에 북한의 팔을 비틀어 달라고 매달릴 건가. 우리가 미국을, 아니 미국이 우리를 버리지 않는 한 중국이 북한을 버리긴 어렵다. 군사행동이 아니라면 미국은 뭘 할 건가. 군사훈련 중단. 그러면 북한이 핵실험을 중단할까. 미군 철수를 하면 포기할까. 미국의 1차적 관심은 미국의 안전이다.
 
우리가 운전석에 앉으려면 좋은 구상을 내놓는 방법뿐이다. 그것으로 주변국을 설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안의 레드라인부터 지우는 것이다. 한·미 사이에, 또 국내에서 공감대를 넓혀야 한다.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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