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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인천 물류창고에 영어원서 190만권이 쌓여 있는 까닭은? 100억원어치가 폐지로는 1억여원어치

중앙일보 2017.08.21 00:01
해법에듀는 악성재고를 떠넘긴 피어슨에듀케이션과 교보문고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피어슨 판매 독점권 확보 조건으로 교보문고로부터 받은 영어 원서들이 쌓여 있는 인천시 서구 인천터미널 물류단지 내 해법에듀 물류창고. 임명수 기자

해법에듀는 악성재고를 떠넘긴 피어슨에듀케이션과 교보문고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피어슨 판매 독점권 확보 조건으로 교보문고로부터 받은 영어 원서들이 쌓여 있는 인천시 서구 인천터미널 물류단지 내 해법에듀 물류창고. 임명수 기자

 
인천시 서구 인천터미널 물류단지 안에 있는 ㈜해법에듀 물류창고. 모두 4개 층인 이 창고를 최근 찾아간 기자가 3층에 올라서자 곳곳에 책들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유독 한 쪽에 놓인 박스들은 비닐조차 뜯지 않은 채 2m 높이로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해법에듀, 영국 피어슨 발간 책 국내판매독점 계약
피어슨 "교보에 남은 재고 매입하는 조건" 내세워
재고256만권 140억원어치...해법 40억원어치 판매
나머지 교재는 '팔 수 없는 책', 이른바 악성재고

해법에듀 지난해 4월 피어슨과 교보 검찰에 고소
"피어슨과 교보 짜고서 악성재고 떠넘기기" 주장
교보측 "해법이 재고물량 확인해 스스로 가져가"
피어슨측 "시뮬레이션 있으면 법원에 제출해야"

이 창고의 3층 바닥면적(1만5800㎡)의 20%를 차지했다. 4층에도 같은 종류의 박스들이 바닥면적의 10%를 차지하고 있었다. 3층과 4층에 쌓인 박스에 든 책은 유치원부터 대학, 일반 학원 등에서 쓰는 영어교육교재(ELT) 원서들이다. 모두 197만권. 14t 트럭 100대 분량이다. 책에 붙은 가격표 대로라면 금액만 100억원어치이지만 폐지 가격으로 치면 고작 1억4000만원어치다.  
 
그나마 지금 남은 게 이 정도지, 영어교재가 이 창고에 처음 반입될 당시에는 이보다 더 많았다는 게 해법에듀 측 설명이다. 처음에는 원서 256만권, 14t 트럭 125대 분량, 140억원 상당이었다는 것이다. 최근까지 40억원의 책을 판매했지만 ‘이제 더 이상 판매할 수 없는 책’들이라고 해법에듀 측은 설명했다. 사실상 폐지로 처분해야 할 쓰레기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해법에듀 인천 물류창고에 수북이 쌓여 있는 영어원서. 판매가 어려워 사실상 폐지라고 한다.임명수 기자

해법에듀 인천 물류창고에 수북이 쌓여 있는 영어원서. 판매가 어려워 사실상 폐지라고 한다.임명수 기자

 
해법에듀는 왜 이처럼 판매할 수 없는 책을 물류창고에 쌓아 놓았을까.   
해법에듀는 2014년 10월 중순 이들 영어교재를 발행하는 글로벌 출판사인 피어슨에듀케이션 한국지사와 독점권 계약을 맺었다. 영국이 본사인 피어슨에서 발행하는 영어원서를 한국에서 단독으로 판매하는 유통권을 따낸 것이다.    
하지만 조건이 붙었다고 한다. 피어슨이 수 년 전부터 교보문고에 판매했으나 남은 재고를 해법에듀가 인수하라는 것이었다. 금액만 200억원어치 상당이었다. 피어슨에듀케이션 한국지사의 원서를 독점 판매하고 싶었던 해법에듀 측은 이런 조건을 쉽게 뿌리치지 못했다. 협의를 통해 200억원어치 중 140억원어치(256만권)만 가져왔다.
 
해법에듀 관계자는 “당시 피어슨 한국지사 관계자가 ‘교보의 재고 물량은 피어슨 본사에서 판매한 것으로 3년 6개월 정도면 모두 소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해 우리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며 “그 증거로 교보의 재고 목록과 판매실적·매출규모 등을 담은 시뮬레이션까지 보여줬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조건부 계약이기 때문에 교보의 재고물량과 교재들을 확인하려 했지만 피어슨 측 관계자는 ‘우리가 해법과 계약 맺은 사실이 알려지면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 소문내지 말라’며 재고 확인을 못하게 했다. 우리같이 '을(약자)'의 입장인 국내 유통사들로서는 거대한 글로벌 출판기업의 말에 좌우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피어슨에듀케이션 한국지사 측 관계자의 말을 믿고 따를 수 밖에 없는 상태였다”고 덧붙였다. "거대 글로벌 기업의 횡포에 당했다"는 주장이다.
 

해법에듀는 피어슨에듀케이션 한국지사에 이어 2개월 뒤인 같은 해 12월 31일 교보문고와 ‘피어슨에듀케이션 한국지사의 재고물량’을 인수하는 매매 계약을 체결했다.  
1996년도에 발행된 서적. [사진 해법에듀]

1996년도에 발행된 서적. [사진 해법에듀]

 
문제는 교보문고로부터 재고 물량을 받은 뒤부터였다. 3년 간 판매부수가 단 한권도 없는 도서가 들어 있는가 하면, 이미 절판됐거나, 정식 출판조차 안 된 도서도 포함돼 있었다. 또 발행일이 짧게는 7년에서 길게는 20년이 지난 책들도 있었다. 일부 교재는 1~4권 등 시리즈물임에도 중간 순서가 없는 것도 많았다. 해법에듀 측은 "판매가 불가능했다"고 주장했다. 
 
해법에듀 관계자는 "교보문고 측이 자신들이 밀어내기로 중간도매상에 보냈던 교재까지 일괄 납품받아 해법에듀에 넘겼다"고 주장했다. 밀어내기는 유통사(수입사)가 자신들의 매출을 올리기 위해 중간도매상(총판)에 계약 없이 책을 넘긴 뒤 조금씩 반품 받는 일종의 편법이자 출판계 관행이다. 밀어내기 규모는 통상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이른다고 했다. 
 
실제로 서울에서 총판을 운영하는 A씨는 “교보문고로부터 17억원 상당의 밀어내기 재고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반품하라고 해 마음이 바뀔까봐 창고에 쌓인 책을 얼른 가져다 줬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책이 해법에듀 쪽에 갔더라”고 말했다. 

교보문고로부터 구매한 재고물량 중 시리즈물 중간이 비어 있는 서적. [사진 해법에듀]

교보문고로부터 구매한 재고물량 중 시리즈물 중간이 비어 있는 서적. [사진 해법에듀]

 
사정이 이렇자 해법에듀는 지난해 4월 ‘계약을 미끼로 악성재고를 떠넘겼다’며 피어슨에듀케이션 한국지사와 (주)교보문고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해법에듀의 재고물량 140억원 중 1차로 피어슨에듀케이션 한국지사와 교보문고에 지급한 50억원을 되돌려 달라는 지급금 반환 청구 소송이다. 이 소송은 현재 중앙지법에서 1년4개월째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르면 11월 중에 1심 결과가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해법에듀 관계자는 "민사 소송과 별도로 피어슨에듀케이션 한국지사와 교보문고 측을 사기 혐의로 검찰에 고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해법에듀 관계자는 “처음부터 우리가 더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인정한다”면서도 “하지만 피어슨 에듀케이션 한국지사 측이 시뮬레이션을 보여주며 소진 가능하다고 했고 교보문고의 재고물량 확인을 못하게 해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피어슨에듀케이션 한국지사 측이 시뮬레이션으로 보여준 자료는 교보문고 측에서 판매 및 매출실적 등을 줬기 때문에 만들어진 자료다. 교보문고 측도 우리와 계약을 맺으면서 악성재고를 반품 받지 않으려 매매 계약 체결 시 ‘반품은 없다’는 조건을 달았다”고 주장했다.  
피어슨에듀케이션한국지사와'반품 없다'는 내용이 담긴 계약서. [사진 해법에듀]

피어슨에듀케이션한국지사와'반품 없다'는 내용이 담긴 계약서. [사진 해법에듀]

 
이에 대해 교보문고 측은 황당하다는 입장이다. 해법애듀 측이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지난 16일 기자와 만난 교보문고 측 관계자는 “피어슨에듀케이션 한국지사 측에 우리의 판매데이터나 매출실적 등을 건넨 사실이 없다. 해법에듀는 시뮬레이션 자료가 있다면서 왜 재판에 제출하지 않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해외출판사의 독점 계약의 경우 독점적 지위의 소유권을 넘기는 것이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반품 없음’을 내세워 계약한다. 해법에듀가 주장하는 ‘반품 계약’은 유통사와 중간도매상 간 위탁계약을 맺을 때 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해법에듀와 계약 당시 우리 재고 리스트를 모두 제공했고, 그들이 필요한 부분을 가져간 것”이라며 “해법에듀 측이 판매가 부진하자 소송을 제기하고, 그것도 모자라 언론플레이를 하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피어슨에듀케이션 한국지사 관계자도 지난 8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린 적도, 보여준 적도 없다. 해법에듀 측은 시뮬레이션 자료가 있다면 법원에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해법에듀가 계약할 때 (재고)타이틀 중 원하는 것을 가지고 갔다. 그들이 제출한 리스트도 가지고 있다. 현재 소송이 진행되고 있어 더 이상은 언급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국내 중소 출판유통기업과 글로벌 거대 출판 대기업 측의 법정 다툼 결과가 주목된다. 
인천=임명수 기자 lim.myouns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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