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랙코미디처럼 시작해 '전원 실형'으로 끝난 '정운호 게이트'

중앙일보 2017.08.20 17:13
“법을 경시하고 돈이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그릇된 행태를 보였다.”
지난 18일 서울고법 형사1부 김인겸 부장판사는 정운호(52)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에게 징역 3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중저가 화장품 브랜드 '더페이스샵''네리처리퍼블릭'의 잇단 성공으로 수천억원대 자산가 반열에 올랐던 정 전 대표의 셀프 구명 시도가 현직 판·검사가 연루된 대형 법조 비리로 번졌던 사건 전말에 대한 평가를 담은 말이었다. 뿔테 안경에 하늘색 수의 차림으로 피고인 석에 선 정 전 대표는 고개를 떨궜다.

18일 법원 "돈이면 모든 것 해결할 수 있다는 행태" 지적
최유정ㆍ홍만표ㆍ김수천 등 정운호 얽힌 법조인 모두 실형
법조계선 "전관비리 근절 대책 아직 미약" 지적 나와

 
 
이날 선고로 지난해 4월 '재소자의 여 변호사 폭행 의혹' 사건으로 시작됐던 '정운호 게이트'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절차도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주요 관련자 중 항소심이 마무리되지 않은 사람은 법조 브로커 이동찬(45)과 질병 치료 등의 문제로 늦게 기소된 박모(54) 전 검사 정도다. 남은 상고심에서는 더 이상 사실관계를 다툴 수 없다. 
 
항소심 공판에 출석한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 [연합뉴스]

항소심 공판에 출석한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 [연합뉴스]

 
'50억 수임료'  시비로 시작…최유정·홍만표 등 관련자 전원 실형
 
자신에게 수천억원의 이익을 가져다 줄 '네이처리퍼블릭' 상장을 앞두고 2014년 검찰의 동남아 원정 도박 수사에 걸려든 정 전 대표는 50억원을 대가로 보석을 장담하는 판사 출신 최유정(47) 변호사의 꾐에 넘어갔다. 정씨는 훗날 지인에게 "담당 부장검사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데 넘어갔다"고 털어놨다고 한다. 검찰이 보석에 대해 재판부가 알아서 하라는 취지의 의견( '적의 처리')을 냈음에도 2016년 2월 보석이 기각되면서 생긴 최 변호사와 정 전 대표의 갈등은 폭행 시비로 번졌다. 
정 전 대표를 강남경찰서에 고소했다가 불똥이 옮겨 붙은 최 변호사는 정 전 대표 사건 등에서 100억원 대의 부당한 수임료를 챙긴 혐의로 구속 기소됐고, 정 전 대표의 과거 도박 사건수사 단계에서 변호에 참여했다가 주목받았던 홍만표 전 검사장은 정 전 대표와는 무관한 탈세 등의 혐의까지 드러나면서 결국 구속 수감됐다. 수사과정에서는 홍 전 검사장이 변호사로서 수백억원대의 소득을 올리면서 오피스텔과 상가 등 100여 채의 부동산을 사들인 사실도 드러났다. 
 
검사장 출신 홍만표 변호사가 27일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의 법조비리 의혹과 관련해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소환 조사에 응했다. 오종택 2016.05.27.

검사장 출신 홍만표 변호사가 27일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의 법조비리 의혹과 관련해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소환 조사에 응했다. 오종택 2016.05.27.

지난 7월 최 변호사는 항소심에서 1심과 같은 징역 6년의 중형을 받았다. 추징금 43억1250만원도 선고 됐다. 당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공정한 재판 절차가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최 변호사의 욕심으로 사법 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됐다"고 말했다. 홍 전 검사장은 지난 6월 항소심에서 징역 3년(1심)에서 징역 2년으로 감형됐다. 개업 직후인 2011년 9월 정씨 측으로부터 네이처리퍼블릭 지하철 매장 임대 사업과 관련한 공무원 청탁 대가의 명목으로 2억원을 받은 혐의와 13억원의 조세포탈 혐의 등을 유죄로 인정한 결과였다. 
 
어김없이 등장한 '브로커' …현직 판·검사도 연루 충격
 
두 전관의 어두운 그림자 옆에는 어김없이 '법조 브로커'가 있었다. 홍 전 검사장의 고교 후배로 홍 전 검사장과 정 전 대표 사이의 다리 역할을 했던 법조 브로커 이민희씨는 수사과정에서 '함구 전략'으로 일관했지만 지난 7월 항소심에서 1심과 같은 징역 4년 형을 받았다. 네이처리퍼블릭 지하철 매장 사업권 입찰과 관련해 서울시 감사 무마 등을 명목으로 9억원을 챙긴 것 등이 이씨의 주요 혐의다. 최 변호사와 사실상 동업하고 최 변호사와 정 전 대표 사이의 수임료 협상에도 개입했던 브로커 이동찬씨(45)는 지난해 1월 변호사법 위반 혐의 등으로 징역 8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최 변호사를 구속 기소하면서 검찰이 “건국 이래 최대의 불법 법조 브로커 사건”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정 전 대표의 구명 로비와 관련해서는 수많은 판·검사들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구속 기소된 '현직'은 김수천(57) 전 인천지법 부장판사와 박모(55) 서울고검 검사, 검찰 수사관 1명 정도였다.  
 
'레인지 로버 판사' 뇌물 무죄…"전관 근절 요원" 비판도
 
'레인지 로버 판사'로 널리 알려진 김 부장판사 뇌물수수 사건은 재판과정에서 '제식구 감싸기' 논란까지 빚어지면서 법조계에 길고 큰 여파를 몰고 왔다. 각종 재판 청탁 명목으로 약 1억8000만원 상당의 금품과 물품(레인지로버 자동차 포함)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됐던 김 부장판사는 항소심이 "대가성 입증이 부족하다"며 뇌물수수 혐의를 무죄로 판단하면서 징역 7년에서 징역 5년으로 감형됐다. 정 전 대표의 항소심도 김 전 부장판사의 항소심 결과에 영향을 받았다. 김 전 부장판사에 대한 금품제공이 무죄로 판단되면서 1심(징역 5년)보다 형량이 줄었다. 인정된 것은 회삿돈 총 108억원을 횡령한 혐의와 검찰 수사관 김모씨에게 2억5500만원을 준 혐의(뇌물공여)는 인정됐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정운호 게이트는 법조브로커와 전관의 공생, 전관들의 몰래 변론과 탈세, 전관예우 관행, 현직 검·판사들에 대한 금품 제공과 부정한 청탁 등 '전관 비리'의 모든 형태가 집약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지난해 대법원은 대법관 출신 '전관' 변호사가 수임한 상고심 사건은 하루라도 같이 근무했던 대법관이 맡지 못하도록 하는 등 많은 대책을 내놨다. 선임계를 내지 않은 '몰래 변론'을 금지하는 규칙을 명문화하고, 특히 외부에서 재판부에 걸려온 전화는 상황에 따라 녹음을 하도록 방침을 정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전관 비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하는 법조인은 많지 않다. 
 
김한규 전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은 "최근 전관예우 근절 대책은 대법관이나 검찰총장 등 최고위 판·검사에만 집중되고 있다"며 "최유정·홍만표 같은 검사장이나 부장판사급 전관들도 최소 1~2년이라도 개업을 제한하는 등 실질적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박사라 기자 park.sara@joongang.co.kr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