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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한넨 재판 맡은 판사 펑수화 “청탁을 분간하기 힘들다”

중앙선데이 2017.08.20 01:40 545호 28면 지면보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42>
1 상하이 상임부시장 시절, 소련 연예인 대표단을 맞이하는 판한넨. 1952년 11월 27일, 상하이 역 플랫폼.

1 상하이 상임부시장 시절, 소련 연예인 대표단을 맞이하는 판한넨. 1952년 11월 27일, 상하이 역 플랫폼.

1962년 6월 초순, 최고인민법원은 광시좡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고급 인민법원에 전문을 보냈다. “심판원 펑수화(彭樹華·팽수화)가 고향에 체류 중이다. 즉시 귀경하라고 전해라.” 1주일간 모친의 병상을 지키던 젊은 판사는 노모와 영원히 이별했다.

펑수화, 딩펀과 등산 중 폭우 만나
자신의 답답한 심경 시로 표현
판한넨 수감은 마오와의 돈 문제 탓

 
베이징으로 돌아온 펑수화를 형사 1부장 쩡한저우(曾漢周·증한주)가 호출했다. “당 중앙이 판한넨(潘漢年·반한년)의 재판을 열기로 결정했다. 법원 당조직(黨組)은 나와 딩펀(丁汾·정분) 그리고 너에게 중임을 맡겼다.”
 
쩡한저우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았다. “재판이 언제 열릴지는 나도 모른다. 판한넨은 친청(秦城)감옥에 있다. 우리는 감옥에 가서 사건자료를 숙지해야 한다. 감옥까지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매일 왕복이 불가능하다. 너는 딩펀과 함께 감옥에 머물며 판한넨 관련 자료를 살펴라. 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두 사람을 데리러 가겠다.” 당 조직의 결정이라며 준비 게을리하지 말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집무실에 돌아온 펑수화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연신 담배 피워 대며 물만 들이켰다. 반세기 후, 당시를 회상했다. “판한넨 사건은 당 중앙과 마오 주석도 여러 차례 거론한, 신중국 성립 후 가장 중요한 안건이었다. 당과 국가의 중요한 기밀과 많은 사람이 연루된, 특수 사건이었다. 판한넨도 보통인물이 아니었다. 당과 국가의 지도층 간부이며 원로 당원이었다. 혁명 원로나 직책이 상당한 사람이 아니면 심판이 불가능했다. 쩡한저우는 장정(長征)에도 참여한 최고인민법원의 중요 간부였다. 법원 당조의 일원이기도 했다. 딩펀 여사도 항일전쟁 전에 입당한, 노련한 법관이었다. 나는 직위도 낮고 경력도 신통치 않았다. 중요한 임무를 맡긴 당 조직을 원망했다.”
 
딩펀과 함께 친청감옥에 상주하며 판한넨 사건자료를 열람한 펑수화는 문장력이 뛰어났다. 판한넨의 억울함은 물론이고, 감옥에 관한 빼어난 글을 남겼다. 일부 소개한다. “친청감옥은 해방초기, 소련 전문가의 설계로 옌산산맥(燕山山脈)과 타이항산맥(太行山脈)이 만나는 쥔두산(軍都山) 남록(南麓)에 건조한 현대식 감옥이었다. 4면이 높은 담장인 감옥은 전후(前後) 양원(兩院)으로 나뉘어 있었다. 전원은 사무실과 강당, 직원식당, 경비병 주둔지, 직원가족 숙소였다. 후원이 진짜 감옥이었다. 방마다 수세식 변기와 세면실이 완벽했다. 갇힌 사람들은 옆방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는 구조였다. 전원은 감옥 측이 발행한 증명서만 있으면 출입이 자유로웠다. 후원은 경비가 삼엄했다. 증명서만 보지 사람은 보지 않았다. 공안부 13국 국장이 발행한 증명서가 없으면 아무리 높은 신분이라도 들어갈 수 없었다.”
 
주변 정경도 수채화처럼 묘사했다. “감옥 후면은 산이었다. 도처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자태를 뽐냈다. 사과나무 사이에 감나무와 배나무도 적지 않았다. 복숭아밭은 끝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멀리 보이는 정상마다 청송(靑松)이 숲을 이룬 절경이었다. 남쪽에는 작은 마을이 있고, 동쪽에는 맑은 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감옥보다는 휴양 시설이 제격인 지역이었다.”
 
2 판한넨은 티베트 종교 지도자들과 교분이 깊었다. 1953년 봄 상하이를 방문한 판첸 라마와 건배하는 판한넨. [사진 김명호 제공]

2 판한넨은 티베트 종교 지도자들과 교분이 깊었다. 1953년 봄 상하이를 방문한 판첸 라마와 건배하는 판한넨. [사진 김명호 제공]

두 사람은 1개월간 판한넨 심문기록을 살폈다. 정리가 잘된, 완벽한 문건이었다. 글씨도 깔끔하고 보기에도 수월했다. 보면 볼수록 허점투성이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천하의 판한넨이 반당(反黨)과 간첩행위를 인정한 이유가 궁금했다.
 
날이 갈수록 딩펀과 펑수화는 말수가 적어졌다. 하루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산책을 나갔다. 땀 흘리며 산정상에 올랐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폐허가 된 절로 몸을 피했다. 비가 그치자 신선한 공기가 주변을 감쌌다. 맑았던 개울은 흙탕물로 변했다. 말없이 감옥을 향하던 펑수화는 판한넨을 생각하며 만감이 교차했다. 시상(詩想)을 억누를 방법이 없었다. “뭇 승려들의 간 곳은 알 길이 없고, 무너진 벽 바라보며 서풍(西風)을 비웃는다. 샘에서 솟는 물은 변함이 없건만, 산에서 비 내리니, 청탁을 분간하기 힘들다.”
 
듣기만 하던 딩펀이 입을 열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느냐? 마지막 구절 무슨 뜻이냐? 그냥 해 본 말이냐, 아니면 판한넨 신문기록 열람한 소감이냐? 즉흥적으로 나오는 시는 속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다.” 펑수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딩펀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감옥 문전에 다다르자 딩펀이 침묵을 깼다. “우리의 판한넨 사건에 대한 시각은 같다고 본다. 중앙에서는 이미 판결을 내렸다고 들었다. 사형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장기형을 의미한다. 재판은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의 의견을 제출할지 여부를 쩡한저우와 의논하자.”
 
판한넨이 감옥에 갇힌 이유는 간단했다. 마오쩌둥과 판한넨, 두 사람 간의 문제였다. 그것도 마오에게는 치명적인 돈 문제였다. 1936년, 장정을 마친 마오쩌둥은 수중에 돈이 없었다. 옌안에 와 있던 판한넨을 불렀다. “미화 5만불 정도가 필요하다. 소리 소문 없이 변통할 수 있는 곳을 생각해 봐라.” 판한넨은 무슨 일이건 대책이 있는 사람이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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