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바마도, 네타냐후도...세계 정상 홀리는 '레드 라인'의 유혹

중앙일보 2017.08.18 14:37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했다. [사진제공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했다. [사진제공 청와대]

선을 한번 긋고 나면 나중에 감당이 힘든 말이 있다. '레드라인'(임계선)이야기다. 상대방을 향해 “이것이 레드 라인이다. 여기를 넘을 경우 엄청난 대가를 각오하라”고 경고하는 지도자는 단호해 보인다. 하지만 한번 내뱉고 나면 부메랑으로 돌아와 스스로를 옥죄기 십상인데, 세계 정상들은 그 달콤한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1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무기화를 레드 라인으로 규정했다.
 
◇“내가 그은 레드 라인 아니다” 말 바꾼 오바마=레드 라인의 유혹에 넘어간 정상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2012년 8월 시리아의 알아사드 정부가 화학무기 사용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당국의 보고를 받은 오바마 전 대통령은 참모들과 주말 내내 마라톤 전략 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 러시아 같은 제3국 중재자를 통해 알아사드 정부에 경고를 보내자는 결론이 나왔다.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화학무기를 이동시키거나 사용하는 것이 레드 라인”이라며 “이런 일이 생기면 나의 계산을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원고에 없던 발언이었다. 뉴욕 타임스(NYT)는 “전략회의에 참석했던 일부 참모들은 ‘대체 어디서 레드 라인이 튀어나온 것이냐’며 놀랐다. 당초 계획은 알아사드 정부에게 겁을 주는 것이지, 대통령이 어떤 행동에 얽매이게 하려는 게 아니었다”고 보도했다.  
 
 
2012년 8월20일 기자회견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시리아의 화학 무기 사용을 '레드 라인'으로 규정했다. [사진 백악관]

2012년 8월20일 기자회견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시리아의 화학 무기 사용을 '레드 라인'으로 규정했다. [사진 백악관]

오바마 대통령은 1년 뒤 레드 라인 발언의 후폭풍에 직면한다. 2013년 8월 알아사드 정부는 수도 다마스쿠스 외곽의 구타 지역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했고, 약 1400명이 사망했다. 미국은 군사적 행동 검토에 나섰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공화당 소속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그 레드 라인은 사라지는 잉크로 그은 것임에 틀림 없다”고 비난했다. 2013년 9월 오바마 대통령은 “레드 라인은 내가 그은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그은 것이다. 시리아 정부의 화학무기 사용이 인도주의적으로 옳지 않다는 데는 압도적 의견 일치가 이뤄져 있다”고 슬쩍 말을 바꿨다.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2012년 9월 유엔총회 연설 도중 매직 펜으로 직접 레드 라인을 긋고 있다. [유엔웹티비 캡쳐]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2012년 9월 유엔총회 연설 도중 매직 펜으로 직접 레드 라인을 긋고 있다. [유엔웹티비 캡쳐]

◇빨간 매직펜으로 진짜 레드 라인 그은 네타냐후=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란의 핵 개발을 두고 레드 라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말로만 한 게 아니라 직접 보여줬다. 2012년 9월 유엔 총회에서 그는 “이란이 내년 여름까지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농축 우라늄을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뇌관에 불이 붙은 폭탄이 그려진 종이를 들어 보였다. 이란의 우라늄 농축 수준이 표시된 그림이었다. 네타냐후 총리는 주머니에서 매직 펜을 꺼내더니 90% 바로 밑에 빨간 선을 그으며 “이란이 두번째 단계의 핵농축을 마치기 전에 (군사공격 시점을 가늠할)레드 라인을 설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은 “긴장을 고조시키는 행위”라며 반대했고, 국제사회는 곧 이란 핵 폐기를 위한 협상에 돌입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2012년 9월27일 유엔총회에서 그림과 빨간 매직 펜을 들고 나와 이란 핵에 대한 레드라인 설정을 주장했다. [사진 유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2012년 9월27일 유엔총회에서 그림과 빨간 매직 펜을 들고 나와 이란 핵에 대한 레드라인 설정을 주장했다. [사진 유엔]

백악관은 2015년 4월 이란 핵협상에 반대한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겨냥, 협상이 있었기에 이란 핵이 레드 라인을 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백악관 트위터]

백악관은 2015년 4월 이란 핵협상에 반대한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겨냥, 협상이 있었기에 이란 핵이 레드 라인을 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백악관 트위터]

그의 ‘레드 라인 퍼포먼스’는 이란 핵협상이 타결된 2015년 다시 화제가 됐다. 백악관이 이란 핵 합의 내용을 쉽게 설명하는 그림을 공식 트위터 계정에 올렸는데, 네타냐후 총리가 유엔 총회에 들고 나왔던 것과 같은 폭탄이었다. 90% 밑에 그어진 빨간 선까지 똑같았다. 하지만 백악관의 그림에는 불붙은 뇌관이 가위로 잘려 있었다. 핵협상이 타결되지 않았다면 빨간 선을 넘었겠지만, 합의가 됐기 때문에 더 이상의 우라늄 농축은 없다는 설명도 함께였다. 이란 핵협상 타결을 비난하는 네타냐후 총리에 대한 백악관의 ‘창의적인 디스’였다. 의회 전문지 더 힐은 “백악관이 트위터로 네타냐후 총리에게 한 방 날렸다”고 표현했다.   
최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도 레드 라인을 꺼내들었다. 지난달 홍콩 반환 20주년 기념식에서 “중앙 권력에 대한 도전과 홍콩을 이용해 중국 본토를 파괴하려는 행위는 모두 레드 라인을 넘는 것으로, 절대 용인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하겠다”는 모호하게, “하지 마라”는 구체적으로 해야=레드라인을 설정하면 상대방이 넘을 경우 상응하는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
그 간 북한의 계속된 도발에도 정부는 레드 라인이나 '게임 체인저', '강을 건너다' 등의 표현을 공식적으로는 피했다. 그런 선을 대통령이 직접 그어 버린 것이다. 17일 오후 외교부 정례브리핑에서 레드 라인과 관련한 질문이 쏟아지자 조준혁 대변인은 “대통령 말씀 외에 덧붙일 것은 없다”는 답만 도돌이표처럼 반복했다.
 북핵 문제에서 레드 라인 설정은 처음도 아니다. 98년 북한이 탄도미사일 대포동 1호를 시험발사한 뒤 당시 윌리엄 페리 미 대북정책조정관이 작성한 보고서에 이미 레드 라인이 등장한다.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또 발사하거나 제네바 합의를 위반하는 핵 개발을 할 경우 이를 사실상의 레드 라인으로 받아들이고 대북 포용 정책에서 봉쇄 정책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 레드 라인을 거침 없이 넘었다. 지금처럼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고도화한 상황에서 레드 라인을 긋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지적도 그래서 나온다. 미 외교안보전문 매체 디플로매트의 앤킷 판다 선임에디터는 18일 “문 대통령이 정말 북한의 ICBM 무기화를 레드 라인이라고 한 것이라면, 북한은 이미 그 라인을 넘었다”며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도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올 1월 신년사에서 ICBM 개발을 이야기했을 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6개월 뒤 그런 일은 일어났고, 트럼프 대통령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신각수 전 주일 대사는 “레드 라인은 통상 이를 넘으면 비무력적 방법에서 무력적 방법으로 해결 방식이 바뀌는 것을 뜻한다. 문 대통령이 이를 의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호전적 행동을 계속하는 가운데 단호함을 보이려한 것 같은데, 공개 석상에서 이렇게 너무 자세한 부분까지 언급을 하면 실수가 나와 본말이 전도될 수 있다"며 "최고 지도자의 메시지가 갖는 무게감이 있기 때문에 실수라 해도 고치기가 힘들다”고 했다.  
  레드 라인은 ‘어디에 긋느냐’보다는 ‘어떻게 긋느냐’에 따라 상대방의 행동을 억제하는 효과가 결정된다. 미 전략사령부 산하 전략자문단 정책소위원회가 1995년 작성한 보고서(‘포스트 냉전 시대 억제의 핵심’)에는 ^상대방이 선을 넘을 경우 우리가 할 대응은 모호하게 규정하되 ^그 결과가 매우 끔찍할 것임은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상대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지목하되 ^허용되는 행동이 어디까지인지는 밝히지 말아야 한다고 적었다. “공포의 본질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어느 선을 넘을 경우 우리가 비이성적이거나 통제 불가의 대응을 할 수도 있다고 의심하게 만드는 데 있다”는 설명이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