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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신십장생

중앙일보 2017.08.17 01:55 종합 31면 지면보기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시쳇말로 추억놀이 같았다. 다 쓰고 난 볼펜 몸통에 몽당연필이, 그리고 펜촉이 꽂혀 있었다. 예전엔 흔한 풍경이었지만 지금 보니 되레 새롭다. 중학생 시절 누런 갱지 연습장도 떠올렸다. 수학 문제를 풀든, 영어 단어를 외우든 일단 연필로 먼저 쓰고, 그 위에 볼펜으로 다시 썼다. 빈틈없이 빽빽하게 적었다. 손바닥에 흑연 자국이 자욱하게 남았다.
 
피식 싱거운 웃음이 번졌다. 나도 정말 구닥다리가 됐나 보다,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오는 10월 말까지 서울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는 ‘쓰레기×사용설명서’ 특별전을 보고 나서다. 기획 의도는 확연했다. 대량생산·대량소비 사회의 안팎을 살펴보자는 취지다. 멀쩡한 물건도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이 시대에 대한 반성문 비슷했다.
 
전시는 아기자기했다. 거름지게·똥장군 등 분뇨(糞尿)조차 애지중지했던 농경사회의 유물부터 정겹다. 6·25전쟁의 흔적도 아련했다. 군용 담요로 만든 바지는 애교에 가까웠다. 야전 전화선인 피피선(삐삐선)으로 만든 장바구니, 포탄피를 재활용한 등잔·석유등·필통을 보고 엉뚱한 상상도 했다. “김정은이 발사한 미사일 탄피를 거둬들여 등잔으로 쓰는 날도 올까.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되겠지.” 종말론 SF영화도 아니고 말이다.
 
전시장 한 귀퉁이의 설치미술 ‘신(新)십장생’이 눈에 확 들어왔다. 동덕여대·경희대 학생들의 합작품이다. 해·산·물·돌·구름·소나무·불로초·거북·학·사슴 등 오래 살고 죽지 않는 전통 십장생을 분해가 되지 않는 요즘의 물건으로 대체했다. 예컨대 거북은 평균 40년을 사는 반면 스티로폼은 평생 썩지 않는다. 또 양파망은 600년, 유리병은 100만 년이 지나야 자연으로 돌아간다. 1회용 나무젓가락도 분해되는 데 20년이 걸린다.
 
일상의 낭비는 더 심각했다. 국내에서 한 해 버려지는 우산이 4000만 개나 된다고 한다. 2005년 폐기된 전자제품이 5t 차량 16만 대에 이른다. 오늘도 서울에서만 5t 청소차 600대 분량의 쓰레기가 나오고 있다.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온 엄마의 당부가 들려왔다. “얘들아 잘 봤지, 물건 정말 아껴 써야 해.” 그럼에도 그 말이 힘없이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 우리가 ‘신십장생’에 완전 포위됐기 때문은 아닐까.
 
박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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