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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돈, 월급 털어 책 모으기 40년 "한국서지학 기초 닦았죠"

중앙일보 2017.08.15 13:53
정년 기념 소장도서전을 여는 오영식 교사. "도서관에서도 볼 수 없는 희귀자료를 많은 이와 공유하게 돼 매우 즐겁다"고 말했다.

정년 기념 소장도서전을 여는 오영식 교사. "도서관에서도 볼 수 없는 희귀자료를 많은 이와 공유하게 돼 매우 즐겁다"고 말했다.

벌써 42년 전이다. 중앙대 국문과 2년생 오영식은 학교 도서관에서 낭패를 봤다. 학생들이 면도날로 책 주요 대목을 찢어간 경우가 많았다. 그때 결심했다. “용돈을 털어서 한국문학 책을 모아보자.” 당시 그는 서울 연신내에 살았다. 동네 주변에 헌책방이 많았다. ‘현대문학’ ‘사상계’ 과월호 등을 사들였다. 차비가 없어 집까지 걸어온 적도 여러 번. 서정주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귀촉도』를 만나는 행운도 있었다. 거금 2600원을 들였다. 그가 구입한 최초의 ‘고서(古書)’다. 문예지 과월호가 30원 하던 시절이었다.
 오씨는 졸업 후 국어교사가 됐다. 서울 재현고(1981~85)·보성고(1985~2017)에서 가르쳤다. 선생님이 됐어도 수집벽은 계속됐다. 월급을 쪼개며 헌책방을 돌았다. 종종 경매에도 참여했다. 그렇게 모은 책이 3만여 권. 근대 이후 한국문학 관련서가 대다수다. 구슬도 꿰야 보배, 그는 자료 정리에도 열심이었다. 애서가를 넘어 서지연구가로 이름을 알렸다.

고교 국어교사 오영식씨의 책사랑
근대 한국문학 서적 3만여 권 모아
26일까지 인사동서 정년 기념 전시

1880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발간된 '한불자전'. 한글이 들어간 최초의 외국어 사전으로 꼽힌다.

1880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발간된 '한불자전'. 한글이 들어간 최초의 외국어 사전으로 꼽힌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 인사동 화봉갤러리. 문학평론가 오창은(중앙대 교수)씨가 “한국 근대문학 연구자 중 이분에게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며 오씨를 소개했다. 오씨가 겸연쩍은 듯 말을 받았다. “저는 책을 지켜왔습니다. 능력이 허락하는 한에서, 깜냥껏 책을 지켰습니다.”
1919년 나온 '창조' 2호. '창조'는 한국 최초의 근대문학 동인지로 평가된다.

1919년 나온 '창조' 2호. '창조'는 한국 최초의 근대문학 동인지로 평가된다.

 올해 62세를 맞은 오씨. 16일 36년간의 교직 생활에 마침표는 찍는다. 이를 기념하는 전시 ‘40년-108번뇌’를 26일까지 연다. 한국 근대문학 주요 도서·잡지 265종이 나왔다. 1880년 파리외방선교회가 일본에서 펴낸 최초의 외국어사전 『한불자전』부터 개화기 출판물, 주시경·이해조·이광수·최남선의 주요 작품, 그리고 1946년 2월 나온 『문명퇴치인민독본』까지 망라했다. ‘40년’은 그의 수집 인생을, ‘108번뇌’는 그에 얽힌 사연을 뜻한다.
1929(?)년 발간된 '애인의 선물'. 한국문학 여류 등단작가 1호로 꼽히는 김명순의 시, 소설 등이 실렸다.

1929(?)년 발간된 '애인의 선물'. 한국문학 여류 등단작가 1호로 꼽히는 김명순의 시, 소설 등이 실렸다.

 오씨는 한국문학 연구자들의 학문적 동료로 꼽힌다. 그가 발행한 개인잡지 『불암통신』(1990~2005)은 관련 학자들에게 인기가 컸다. 2010년 창간한 근대서지학회지 『근대서지』는 한국학 연구의 텃밭 역할을 해왔다. 『해방기 간행도서 총목록』 『김광균 문학전집』 등도 냈다. 그는 이런 공로로 16일 제4회 화봉학술문화상을 받는다.
 “제 고집 때문에 적지 않은 고생을 한 가족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책에서 벌레가 나온다며 갖다 버리라는 어머니를 피해 장독대에 올려놓았던 책이 밤새 비를 맞아 손상된 적도 숱했죠. ‘108번뇌’ 전시를 한다고 하니 아내가 그러더군요. 40년 넘게 실컷 즐기더니 이제 와서 무슨 번뇌덩어리라고 말이죠.”(웃음)
오영식 교사가 아끼는 소설가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작가의 서명본이다. 보관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오영식 교사가 아끼는 소설가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작가의 서명본이다. 보관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교단에선 떠나지만 그의 수집·연구에는 정년이 없다. “아직도 정리해야 할 게 수두룩합니다. 현재 15호까지 나온 『근대서지』를 꾸준히 내는 게 1차 목표입니다. 저보다 대단한 수집가도 많지만 소장도서전을 여는 건 제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자료 공유가 그만큼 부족했다는 뜻이죠. 문화는 개개인의 작은 노력이 쌓여서 이뤄집니다. 연신내·장승백이·신촌·청계천·인사동 등등, 수많은 헌책방 주인들의 도움으로 책을 지킬 수 있었어요. 그 분들이 가장 고맙습니다.”
글·사진=박정호 문화전문기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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