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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처럼 평등한 일은 없다”

중앙선데이 2017.08.13 02:00 544호 32면 지면보기
2016년 7월 22일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오페라하우스. 발레 ‘오네긴’ 공연이 끝나자 1400석을 가득 메운 관객이 ‘고마워요’라는 글자와 붉은색 하트가 그려진 카드를 일제히 펼치며 무대를 떠나는 발레리나를 뜨겁게 환송했다. 세계적 명성의 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 30년 전 최연소 단원으로 입단해 이날 최고령 무용수로 무대를 내려온 이 여인은 독일인이 아니다. 발레 종주국 프랑스나 러시아도 아닌, 동양의 발레 불모지 한국에서 온 발레리나 강수진이다.
 

『한 걸음을 걸어도 나답게』
저자: 강수진
출판사: 인플루엔셜
가격: 1만4900원

세상이 바뀌어 세계에서 활약하는 우리 무용수가 흔하다지만, 콧대 높은 독일 최고 발레단에서 종신 단원 자격과 무형문화재 ‘캄머탠저린’ 작위, 유럽 발레 팬들의 진심 어린 존경과 사랑까지 한몸에 받는 한국인 무용수가 다시 나오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가 현역 은퇴 후 발레인생을 되돌아본 신간 『한 걸음을 걸어도 나답게』 에는 피아노 연습을 빼먹고 만화방에 가던 평범한 소녀가 세계 정상의 발레리나 자리에 오르기까지 뚜벅뚜벅 걸어온 여정이 오롯하다.
 
‘한국인 최초 로잔 콩쿠르 우승’ ‘한국인 최초 브누아 드 라 당스 수상’ 등의 고정 수식어에 2014년부터 국립발레단까지 이끌며 명실공히 ‘한국 발레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한 강수진이지만, 타고난 천재 발레리나로 꽃길만 걸었다고 생각한다면 대단한 오해다. 평균보다 한참 늦은 중학생 때 발레를 시작해 한참을 헤맸고, 운 좋게 유학을 가서는 불리한 체격 조건에 좌절하기도 했다. 19살에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최연소 입단했지만 수석무용수가 된 건 30살 때다. 2년간은 무대에 설 기회조차 없었고 7년이나 군무에 머물러야 했던 ‘거북이과’였다.
 
‘입단 동시 파격 주역 발탁’ 등의 뉴스가 흔한 유럽 무용계에서 외로운 마이너리티로 좌절했을 법도 한데, 고난의 세월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치열한 경쟁을 눈물겹게 이겨내고 마침내 성공했다는 식의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없다. 지극히 단조로운 반복 속에 하루하루를 불태웠을 뿐이다. 유학 시절 모두 잠든 새벽에 홀로 달빛을 조명삼아 도둑연습을 하고, 프로가 되서도 하루에 토슈즈를 두세개 씩 갈아치웠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매일 100%의 하루를 살기에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의 경쟁 상대는 오직 자기 자신이었다. 현역시절 아무리 힘들어도 매일 두세 시간의 아침 연습을 거른 적 없고, 은퇴 후에도 “몸에 맞게 잘 쉬는 법을 배우고 있다”며 끝없는 배움을 강조하는 그에게서 인간미는 영 느껴지지 않지만, “누구나 경쟁자를 이길 수는 없지만 노력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세상에 노력처럼 평등한 일은 없다”라는 단순한 명제를 실천해온 자세가 조용히 마음을 흔든다.
 
마냥 열심히만 한 건 아니다. 길에서 같은 옷을 입은 아이를 만나면 그 옷을 버렸다는 유년시절 일화처럼, 남과 비슷한 걸 못 참는 성향이 그를 대체불가능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를 특별하게 하는 아우라가 거저 주어진 게 아니다. 무용수에게 약점인 수줍은 성격을 강점으로 승화시킨 덕에 고요하고도 강인한 특유의 분위기, 뒷모습에도 감정이 느껴지는 ‘강수진 스타일’이 탄생한 것이다.
 
동양인으로서의 핸디캡에 대한 생각도 흥미롭다. 7년이나 군무에 머물면서도 동양인 차별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단다. 의지와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문제를 고민할 필요 없다는 얘기다. 단지 실력이 부족한 탓이라 여겼고, 묵묵히 연습을 계속한 끝에 기회를 얻었다. 실력으로 설득할 수 없는 무대는 없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국립발레단장으로서의 인생 2막도 이런 스텝을 차곡차곡 밟고 있다. 안무가를 키우고, 창작 레퍼토리 개발로 발레단만의 색깔을 만들어 가는 일은 겉으로 크게 화제가 되지는 않지만, 강수진 개인의 성공 메소드를 고스란히 조직에 투영하는 일을 뚜벅뚜벅 해내고 있다. 리더가 되고자 원한 적은 없지만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은 하지 않았단다.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했단 얘기다. 무용인에게만 울림을 주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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