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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차린 밥에 결들인 황태국·보리굴비

중앙선데이 2017.08.13 02:00 544호 28면 지면보기
그는 일 잘하기로 소문난 촬영 감독이다. 동시에 밥 먹을 때 까탈 부리는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지방이나 야외에서 촬영을 하다 보면 밥차를 부르기 마련인데, 그는 밥차의 음식을 ‘요리’가 아닌 ‘조리’라고 부른다. 조미료가 많이 들어간다며 아주 질색을 한다. “한 끼를 먹더라도 제대로 된 밥을 먹고 싶어요. 요즘은 어머니가 해주는 밥이 얼마나 그리운지 몰라요. 멀리 지방에 계시지만 않아도 매일 달려갈 텐데….”
 

이지민의 "오늘 한 잔 어때요?"
<33> 민이한상

이 하소연을 듣고 갑자기 그곳이 떠올랐다. 역삼동 테헤란로의 빌딩 숲 사이 조용한 골목길에 자리 잡은 이곳은 매장 내 한쪽 벽에 크게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우리 가족이 힘을 내서 오늘 하루도 잘 지낼 수 있게 엄마가 맛난 밥을 차리는 마음으로”
 
‘민이한상’은 남도 한정식 명가 ‘해남천일관’을 운영하고 있는 이화영 대표가 두 번째로 오픈한 한식집이다. 가게가 서로 마주 보고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해남천일관은 3대째 93년을 이어온 전라남도 해남의 ‘천일식당’의 맥을 이었다. 창업주인 박성순 할머니가 1924년 국밥집을 차리면서 시작된 이곳은 떡갈비·돼지숯불구이·홍어 등으로 음식을 넓혀갔다. 이후 “최고의 호남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 “전라도 3대 식당”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세를 떨쳤다.
 
박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막내딸인 김정심씨(2015년 작고)가 어머니의 손맛을 재현하고자 94년 서울에 ‘해남천일관’을 오픈 했고 지금은 외손녀인 이화영 대표(51)가 대를 잇고 있다. 해남천일관은 한정식집으로 15가지 이상의 반찬, 10가지 이상의 요리가 상을 가득 채운다. 장류, 식재료 등을 모두 최상품으로 쓰고, 최고의 호남 음식을 만날 수 있다.
 
문제는 한정식이다 보니 가격대가 높다는 것. 점심 한 상 차림은 3만 5000원, 저녁 코스는 10만원. 월급쟁이들에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금액이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뜻이 담긴 좋은 재료로 만든 맛있는 음식을 부담없는 가격으로 좀 더 많은 분들께 맛보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고심하다 지난 3월 초 ‘민이한상’을 오픈하게 되었습니다.”
 
로고에는 바를 정(正)자 안에 가로로 ‘민이’, 그 아래 ‘한상’이 놓여 있다. 앞 글자인 ‘민’과 ‘한’은 두 아들의 이름에서 땄고, 이화영 대표의 성씨인 ‘이’, 이를 바를 정자가 감싸고 있다. 작고한 어머니의 이름 뜻인 바른 마음(正心)을 뜻한다. “할머니가 자식과 손주를 품은 모습을 그려보았어요. 엄마가 저한테 했듯이 저도 아이들한테 그 마음을 전하고 싶었고요. 테헤란로는 직장인이 많은데, 젊은 손님들이 오면 아들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분들이 안심하고 맛있게 드실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었어요.”
 
밥집을 내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어떤 음식을 할지는 고민이 많았다. 해남천일관의 묵직한 컨셉트를 가볍게 구현하는 것이 관건. 끓이는 건 뭐든 자신이 있었다는 그는 황태해장국과 육개장을 대표 메뉴로 골랐다. 겉보기엔 쉬워 보이지만 재료 수급부터 손질한 뒤 요리를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이 길다. 제대로 된 맛을 찾기 위해 유명하다는 맛집은 다 가보았다고.
 
조미료가 아닌 재료 자체로 맛을 내는데 주안점을 뒀다. 육수는 황태 머리로 내고, 국물에 볶은 황태 가루를 한번 더 넣어 맛의 깊이를 더했다. 여기에 감자와 무를 함께 넣어 구수함과 시원한 맛을 동시에 끌어냈다. 얼큰한 국물을 찾는 분들을 위해 준비한 육개장은 사골 육수를 쓴다. 아삭한 맛을 살리는 숙주와 함께 차돌양지·토란·고사리·토란대 등을 풍성하게 담아낸다. 이 대표는 “점심에 해장 음식을 찾는 직장인들이 많아 흰색 해장, 빨간색 해장으로 준비했다”며 웃는다.
 
곁들여지는 솥밥은 밥맛을 더욱 끌어올린다. 그는 “밥이 맛이 없으면 밥 먹은 기분이 나질 않는다”라며 “밥이 떡 져서 나오는 걸 싫어해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막 지은 밥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한쪽 구석에 솥밥 기계가 가득 하다. 비용 투자가 꽤 필요했지만 앞뒤 가리지 않고 구입했단다. “바쁜 직장인들은 10분 기다리기도 어려운데, 8분 만에 밥을 낼 수 있도록 했어요. 많은 분들이 ‘얼마 만에 먹는 맛있는 밥인지 모르겠다’고, ‘밥이 진짜 맛있다’고 하세요.”
 
또 다른 별미는 전복장과 보리굴비. 전복장은 어머니가 많이 해주었던 추억의 메뉴란다. 완도에서 주말마다 공수해오는 전복으로 장을 만들고, 여기에 쇠고기 장조림과 버터, 달걀 노른자를 함께 비벼 먹는다. 다이어트고 뭐고 미친 듯이 숟가락질 할 수밖에 없는 밥도둑 메뉴다. 보리굴비는 요즘 맛보기 좋은 별미 중의 별미. 보리굴비는 잘못 말려 오면 냄새가 나거나 쩐네가 난다. 원하는 사이즈와 원하는 말림 정도를 요청해 전남 영광 조기상회에서 들여온다. 이를 조금 더 말려 꼬들꼬들한 상태에서 쪄낸 뒤 굽는다. 결결이 찢어 먹기 좋게 내는데, 짭쪼름하면서도 구수한 맛이 막 지은 솥밥을 만나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얼음 넣은 녹차 물에 말아 먹어도 좋지만, 맨밥이나 누룽지와 먹는 것도 좋다.
 
매콤한 양념 꽃게장은 여성들이 즐겨 찾는 메뉴.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살만 짜서 낸다. 콩나물과 쓱쓱 비벼 먹으면 된다. 여름엔 재료가 상하기 쉬워 잠시 쉬어 간다. 9월부터 맛볼 수 있다.
 
저녁 메뉴도 2명, 3명, 4명 등 숫자에 맞춰 전·제육볶음·꽃게탕 등을 다양하게 준비했다. 인근 오피스텔에는 1인 가구도 많아 혼밥용 1인석도 마련했다.
 
이 집을 추천하고 “어땠으려나?” 궁금해 하던 차에 전화를 받았다. 지난주에만 무려 네 번이나 갔다고, 좋은 곳 추천해줘서 고맙다며 저녁때 쏘겠단다. 세트 메뉴를 시켜놓고 시원하게 생맥주로 시작해 기분 좋게 소주로 마무리했다. 음식이 맛있으니 술 맛도 끝내준단다. “암요! 그 맛에 사는 거죠!” ●
 
 
이지민 : ‘대동여주도(酒)’와 ‘언니의 술 냉장고 가이드’ 콘텐트 제작자이자 F&B 전문 홍보회사인 PR5번가를 운영하며 우리 전통주를 알리고 있다. 술과 음식, 사람을 좋아하는 음주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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