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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독오독 쫄깃쫄깃, 해초의 매력 입안 가득

중앙선데이 2017.08.13 02:00 544호 22면 지면보기
지루한 장마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잔뜩 찌푸린 하늘과 후텁지근한 열기로 생긴 짜증은 애인마냥 붙어 다닌다. 안달해 봐야 소용없다. 이들의 궁합은 찰떡같아서 쉽게 물러서는 법이 없다. 피하지 못하면 즐겨야 덜 괴롭다. 괜찮은 피서지 한 곳을 소개하겠다. 강원도 평창의 대관령이다.
 

윤광준의 新 생활명품
<66> 지누아리 장아찌

고원의 서늘함이란 누가 모를까. 무작정 일대를 배회할 순 없다. 달궈진 몸을 식히고 멋진 음악으로 머리를 맑게 해주는 데가 있다. 바로 평창이다. 올해로 열네 번째를 맞으며 성공적인 국제음악축제로 자리매김한 평창대관령음악제도 여기서 열린다. 내년 2월엔 이곳에서 세계인이 주목할 동계올림픽도 벌어진다. 평창이 아니더라도 강원도로 오시라. 여름의 더위를 식혀줄 곳으로 이보다 더 좋은 데를 찾기 힘들다. 왜 이리 강원도를 들먹이느냐고? 이유가 있다. 난 강원도 출신이며 강원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전역을 스캔하듯 돌아다녔다. 돌아다녀야 밥이 생기는 직업의 특수성이 가져다준 혜택이다. 신형 모델로 차를 바꾸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동차란 넘치는 거리계의 숫자가 주는 불안 때문에 바꾸는 것이다. 한 번 찾은 동네를 다시 가게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가보지 않은 낯선 세상의 확인이 관심이었던 까닭이다. 역마살 낀 팔자를 괴로워해 본 적 없다.
 
이제는 아무 데나 돌아다니지 않는다. 꼭 가야 하는 곳만 간다. 시간과 열정이 무한정 공급되는 에너지가 아님을 알아버린 때문이다. 시원찮은 곳은 관심도 없다. 재미가 없거나 감동이 없는 곳도 사절이다. 세월을 겪고 살아남은 흔적과 이야기가 훨씬 더 소중해 졌다. 좋은 것만 누리기에도 인생은 짧다.
 
반전이 있어야 이야기가 재미있어지게 마련이다. 날뛰던 내가 정해진 코스를 쳇바퀴 돌 듯 되풀이하며 산다. 고향인 횡성에 거처를 두게 된 덕분이다. 주말마다 차를 몰아 대한민국의 절반 거리인 일산과 둔내를 횡단한다. 서울과 강릉을 잇는 6번 국도 주변의 동네와 풍경을 외우게 된 변화는 덤이다. 같은 곳을 반복해 오가는 일도 즐거울 수 있음을 알았다.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고 지역 특산물과 음식을 알게 되는 쏠쏠한 재미 덕분이다. 두 집 살림을 차린 남자의 심정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고정된 역할조차 시간과 공간을 달리해 만나면 얼마나 신선하게 다가오는지 알았으니.
 
올해 기어코 평창대관령음악제를 찾았다. 이웃 동네에서 벌어지는 잔치를 나 몰라라 할 수 없다. 꽤 오랜 세월 행사를 치러온 관록의 깊이가 만들어낸 안정감을 즐겼다. 음악도 좋았고, 사람도 좋았으며, 선선한 고원의 날씨는 더 좋았다.
 
아무리 좋은 구경거리도 배가 채워져야 다가오는 법이다. 부근의 횡계엔 꽤 많은 음식점이 있다. 이 동네 음식점들의 내력을 안다. 유행처럼 번진 황태 요리와 젊은이들의 입맛에 맞춘 급조된 메뉴들이 대부분이다. 발품을 조금 더 팔아 진부로 가기로 했다. 영업한 지 오십 년이 넘은 부일식당의 밥맛이 생각나서다.
 
밥집은 예전 그 자리에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 자고 돌아서면 없어지는 그저 그런 식당이 아니다. 처음 이 집에 들러 밥을 먹었던 스무 살 남짓의 겨울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사십 년 가까이 드나든 나 같은 식객의 안도감은 각별하다. 이런 식당이 있다는 건 다행스럽고도 고마운 일이다. 변화를 미덕으로 치는 시대의 초조함이 싫은 이의 여유와 뚝심을 느낄 수 있어서다.  
 
‘니주가리’ 있냐고 외치니 “아! 지누아리”
앉자마자 내오는 스물세 종류의 찬이 돋보이는 산채백반 메뉴도 여전하다. 주인장의 넉넉한 품성 같은 음식은 언제나 상이 모자랄 만큼 채워진다. 전라도를 벗어나면 이런 밥상은 거의 받아볼 수 없다. 직접 만든 따뜻한 두부와 진부 일대에서 뜯은 온갖 산채는 정갈한 솜씨로 맛을 냈다. 동해의 젓갈과 생선 토막도 끼어있다. 배 불러도 젓가락을 쉽게 놓지 못한다. 식탐 때문이 아니다. 먹어도 먹어도 채 맛보지 못한 희한한 종류의 나물 서너 개가 상 귀퉁이에 남아있게 마련이니.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반찬 하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누아리’ 장아찌다. 강릉 출신의 후배가 일러줬다. 동해 특산으로 그 맛이 뛰어나다고.
 
아주머니에게 ‘지누아리’를 달라고 했다.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외지 사람이 어찌 지누아리를 알며 이십 년도 훨씬 넘은 과거에 썼던 반찬을 어찌 기억하느냐는 거다. 강렬한 맛은 각인된다. 부일식당에서 처음 맛보았던 ‘지누아리’ 장아찌는 고만고만한 맛을 무력화시킬 만큼 독특했다.
 
산지인 동해안 북부 일대를 벗어나면 ‘지누아리’란 이름을 아는 이조차 없다. 익숙하지 않은 해초의 이름은 나도 좀처럼 외우지 못했다. ‘니주아리’ ‘니주가리’ ‘지아누리’ ‘진동아리’…. 그것이 그것 같고 어떻게 불러도 그럴싸한 이상한 이름이다. 정체불명의 해초는 이후 보지 못해  멀어졌고 먹지 못해 까맣게 잊혀져 버린 먹거리가 되었다.
 
둔내에서 바닷가 주문진항은 한 시간 남짓한 거리로 떨어져 있다. 가끔 시장에 들러 해산물을 사는 즐거움이 있다. 주문진이라면 ‘지누아리’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때까지 정확한 이름을 몰랐다. 단편의 기억에서 떠올린 ‘니주가리’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건어물 가게를 돌며 ‘니주가리’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 많은 점포의 주인들은 모두 고개를 갸우뚱해 했다. 주문진에서조차 기억 속의 맛을 찾는 것은 어려워보였다.
 
그냥 가려고 했다. 길가에 주차해둔 차에 올라타려는 순간 앞에 건어물 파는 집이 보였다. 대뜸 ‘니주가리’ 있느냐고 외쳤다. 주인은 바로 소리쳤다. “아! 지누아리.”
 
개떡처럼 말해도 찰떡처럼 알아듣는 이가 있다. 단 한 번 맛본 ‘지누아리’의 힘은 셌다. 이십 년도 넘은 미각의 기억은 그 집에 있는 마른 ‘지누아리’를 통째로 사게 했으니까 말이다. ‘지누아리’를 취급하는 건어물 가게는 거의 없었다.
 
‘지누아리’는 홍조류 해초로, 바닷물이 차고 빠지는 조간대 바위 틈에 붙어 자란다. 우리나라 해안 전역에 서식하나 수온 낮은 동해에서 자라는 ‘뼈지누아리’를 최고의 맛으로 친다. 세찬 조류 탓에 성장이 늦고 줄기도 작고 탄탄하다. 서식 환경만으로 ‘지누아리’의 식감과 맛이 상상이 된다. 작고 볼품없는 해초를 일부러 양식하는 이들도 없다. 위험한 바위 틈에 들어가 일일이 손으로 따야하는 순 자연산 해초의 진가는 각자 판정하길 바란다.  
 
톳과 비슷하게 생겨, 뒷맛은 달고 미끈
톳과 비슷하게 생긴 홍조류 ‘지누아리’다. 물에 불려 놓으면 해조류 특유의 끈적이는 점액질이 나온다. 강릉이나 속초, 동해안 동네에선 고추장에 담가 장아찌로 먹는 조리법이 널리 퍼졌다. 오독오독한 식감으로 적당한 탄성을 지닌 강인함이 느껴진다. 고추장 속에서 발효되면  장의 향과 맛까지 배어들어 짭조름한 풍미가 더해진다. 뒷맛은 달고 미끈한 해초 본연의 맛이 돋보이는 천연 MSG 같은 맛이라면 좀 공감이 될까.
 
기억의 맛은 영영 되살리지 못할 확률이 높다. 고추장을 누가 담글 것이며, 어디서 숙성시킬 것인가. 마누라도 손사래를 쳤다. 까탈스럽게 굴지 말고 해 주는 대로 맛있게 먹기로 했다. 마누라는 ‘지누아리’를 간장에 졸이는 자기만의 레시피로 완성시켰다. 씹으면 가는 결의 줄기가 주는 탄성을 느낄 수 있다. 공기 충이 들어있어 풍선같이 터지는 톳과 다른 탱탱함이다. 미역과 다시마는 ‘지누아리’에 비하면 흐물흐물하게 느껴진다. 잔 맛도 훨씬 덜하다. 산출량이 적어 희소성의 신화까지 더해진 ‘지누아리’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찾는 일본인들이 부쩍 늘었다. 방사능 배출에 효과가 있다는 속설 때문이다. ●
 
 
윤광준 : 글 쓰는 사진가. 일상의 소소함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즐거운 삶의 바탕이란 지론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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