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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한 기쁨 이어지는 게 행복” 빨강머리 앤의 말이 들리는 듯

중앙선데이 2017.08.13 02:00 544호 8면 지면보기
올해 캐나다 독립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올해 캐나다 독립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오타와 국회의사당 앞에 선 백영옥 작가

오타와 국회의사당 앞에 선 백영옥 작가

어린 시절 즐겨 읽던 세계명작동화 가운데 『빨강머리 앤』(1908)의 주인공 앤 셜리는 여느 여주인공과 달랐다. 화려하고 예쁘지 않았다. 멋진 남자들로 둘러싸여 살지도, 왕자님의 구애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철저히 혼자였고, 주변 환경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유별난 행동거지로 눈총을 사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주 특별한 능력이 있었으니, 바로 ‘절망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재주’였다. 요즘 말로 ‘긍정의 아이콘’이다.
 

소설가 백영옥,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을 가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로 시작되는 TV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부르며 루시 모드 몽고메리(Lucy Maud Montgomery·1874~1942)의 이 자전적 소설로부터 놀라운 영감과 용기와 에너지를 얻었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소설가 백영옥이 있다. 지난해 『빨강머리앤이 하는 말』(아르테)이라는 에세이집도 펴낸 그가 이번 여름, 소설의 배경이었던 캐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 훌쩍 날아갔다.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아르테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컨페더레이션 브릿지. 캐나다에서 가장 긴 다리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컨페더레이션 브릿지. 캐나다에서 가장 긴 다리다.

『빨강머리 앤』을 읽은 후, 나는 줄곧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가보고 싶었다. 1986년 동생과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함께 부르던 시간을 지나, 2007년 회사에 사표를 내고 두문분출하며 앤을 본 후, 『빨강머리앤이 하는 말』이란 제목의 책을 쓰게 된 2016년까지, 그 소망은 30년이나 지속돼 마치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이때의 ‘기다림’은 차라리 삶의 형식이 된다.

 
“전요, 뭔가를 즐겁게 기다리는 것에 그 즐거움의 절반은 있다고 생각해요. 그 즐거움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즐거움을 기다리는 동안의 기쁨이란 틀림없이 나만의 것이니까요.”
 
앤의 이 선물 같은 말이 없었다면, 이번 여행은 꽤 힘들었을 것이다. 인천에서 토론토까지의 비행시간은 13시간 30분. 토론토에서 다시 핼리팩스까지는 2시간 30분, 내가 핼리팩스의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 2시를 훌쩍 넘겨 있었다. 넷플릭스에서 지난 5월에 방영했던 ‘빨강머리 앤(Anne with an E)’을 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침대에 눕자마자 허사가 됐다. 나는 꿈 없이 곯아떨어졌다.
 
그린 게이블 기념품 가게에서

그린 게이블 기념품 가게에서

다음날,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 캐나다에서 가장 길다는 컨페더레이션 다리(Confederation Bridge)를 건넜다. 97년에 완공된 이 다리를 두고 사람들의 반대가 극심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마을 사람들은 섬과 육지를 잇는 다리의 완공으로 월마트 같은 거대 유통 자본들이 들어와 섬의 전통을 깨트리는 걸 우려했던 것이다. ‘발전’보다 ‘보존’을 택한 사람들의 내면 풍경을 살펴보는 일은 내게 늘 흥미로웠다. 그곳이 앤의 고향 마을 사람들이라는 점에선 더 그랬다.
 
퀘백의 어느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퀘백의 어느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빨강머리 앤』에서 ‘샬롯’은 박람회가 열리는 큰 도시처럼 묘사되지만, 직접 보면 작고 소박한 곳이다. 샬롯은 두말할 필요 없는 앤의 도시다. 빨강머리앤을 상영하는 뮤지컬 극장 옆에는 ‘앤과 길버트’를 상영하는 또 다른 극장이 있고, 맞은 편에는 빨강머리 앤의 공식 기념품을 파는 작은 상점이 있다. 올해 캐나다 독립 150주년을 맞아 곳곳에는 국기 모양의 티셔츠를 입고, 국기를 매단 채 달리는 차가 보였다. 샬롯 시내에는 캐나다 곳곳에서 쉽게 눈에 띄는 프랜차이즈 상점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로컬 식당과 카페, 소설을 파는 서점과 아이스크림 가게가 드문드문 이어져, ‘킨포크’라는 말이 탄생한 미국 포틀랜드의 작은 버전처럼 느껴졌다. 느리게 흐른 시간의 흔적들이 낡은 은행이나 집과 집 사이, 공원 가득 고여 있었다. 랍스터가 특산물인 이 도시에 유독 귀여운 랍스터 인형이 자주 보였다.  
 
그린 게이블 앤의 집 앞에 도착해 포즈를 취한 앤.

그린 게이블 앤의 집 앞에 도착해 포즈를 취한 앤.

오타와를 대표하는 건물인 국회의사당 앞. 마침 캐나다 독립 150주년을 축하하는 축제가 열렸다.

오타와를 대표하는 건물인 국회의사당 앞. 마침 캐나다 독립 150주년을 축하하는 축제가 열렸다.

수선화·금잔화 가득한 정원엔 나비와 벌이 붕붕
점심을 먹고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 이동할 때, 창문을 열고 내내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에이번리 마을에 대한 내 추억의 속도는 언제나 앤이 마릴라 아줌마가 모는 마차를 타고 처음 이곳을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는 속도와 같았다. 느리고 심심한 곳. 프린스 에드워드 섬을 먼저 취재했던 한 후배가 캐번디시를 ‘심심한 곳’이라 표현했을 때, 나는 오히려 기뻤다. 내게 심심함이란 이제 지루함이 아니라, 인터넷 속도가 너무 느려서 스마트폰 같은 건 볼 수 없는, 보지 않아도 되는 뜻밖의 세계를 뜻했기 때문이다.
 
캐번디시 북쪽 끝에 있는 앤의 집까지 가는 길에는 작은 어촌 마을이 있었다. 바닷가를 지나오는 동안, 낚시나 카약을 하는 사람들을 보기도 했다. 이런 곳에서 아이가 자라면 자주 서핑을 하고, 무릎이 깨지고, 주근깨가 바글거리는 검게 탄 얼굴을 가지겠구나 하고 상상했다.
 
『빨강머리 앤』의 원제는 ‘초록 지붕 집의 앤(Anne of Green Gables)’이다. 이번 여행에서 바로 그 초록색 지붕 집을 보는 일만큼 중요한 일도 없었다. 앤의 집에 도착했을 때, 솜털 같은 꽃가루들이 흩날리고 수선화와 금잔화가 가득한 정원엔 나비와 벌이 붕붕거렸다. 이곳을 직접 보며 알게 된 건 이런 것들이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이 그린 게이블을 얼마나 적확하게 묘사했는지에 대한 놀라움. 앤과 다이애나가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던 작은 시냇가가 정말 앤의 집 앞을 흐르고 있다는 경이로움. 그리고 매튜 아저씨와 마릴라 아줌마가 홍차를 마시던 부엌 창밖의 풍경이 얼마나 싱그러운지와 실제 앤의 방이 얼마나 작았는지에 대한 것이 그렇다.
 
그린 게이블 앤의 방

그린 게이블 앤의 방

나는 앤의 방에 들어가 다이애나가 살았던 집까지의 거리를 가늠하고, 그들만의 ‘수신호’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방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며 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지를 살펴보던 마릴라 아줌마처럼 초록색 집 창가에 긴 시간 서 있을 수는 있었다. 창 밖으로 이곳에 온 기쁨을 표현하며 빙글빙글 돌다가 벌을 쫓는 한 여자를 보자, 절로 웃음이 났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배경으로 찍은 앤

나이아가라 폭포를 배경으로 찍은 앤

앤과 다이애나가 걸었던 ‘기쁨의 하얀길’을 걸어보니
페기스 코브

페기스 코브

집 밖으로 나와 앤이 다이애나를 만나던 길을 걸었다. 시냇가를 지나 숲속 길을 걷다가 놀랍게도 골프 코스를 발견했다. 하지만 걸음을 조금만 옮기면 아름다운 전나무 숲과 얼핏 라벤더처럼 보이는 보라색 루피터스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조금 더 걸어가면 앤이 ‘기쁨의 하얀 길’이라 명명했던 에이번리의 사과나무 길이 펼쳐질 것이다. 길을 걷다가 “행복한 나날이란 멋지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날들이 아니라, 진주알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인 것 같아”라고 소리치는 앤의 말을 환청인 듯 들었다. 카푸치노 광고에나 등장할 법한 구름이 폭신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그린 게이블에 가기 전 다양한 가게들의 거리를 걷고 있는 백영옥 작가.

그린 게이블에 가기 전 다양한 가게들의 거리를 걷고 있는 백영옥 작가.

주근깨투성이의 이 시끄러운 소녀가 농사일을 도와줄 남자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아이를 키우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마릴라의 반문에 매튜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겐 도움이 되지 않겠지. 하지만 이 아이에게는 분명 도움이 될 테지.”
 
초록색 지붕 집까지 오는 먼 길, 사실 응급사고가 있었다. 핼리팩스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과호흡으로 쓰러진 남자 때문에 기내에 있던 의사 두 명이 동시에 달려오는 일이 생긴 것이다. 사람들의 걱정 속에서 사고가 마무리됐을 때, 비행기는 예정보다 3시간이나 연착되어 있었다. 기내에 앉아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했지만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앤과 다이애나가 걸었던 그 길을 걸으며, 문득 인간에게 아직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선의가 있다는 것, 그런 따스한 마음들이 모여 결국 내가 이 먼 곳까지 오게 된 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여행 사진들 역시 그곳을 지나던 우연한 누군가에 의해 찍힌 것들이었다.
 
루시 몽고메리의 무덤 앞에서 나는 ‘빨강머리 앤’이 내 인생에 얼마나 큰 모험을 감행하게 했는지, 앤이 인생의 어둠 앞에서 나를 얼마나 자주 구해줬는지를 떠올렸다. 나는 몽고메리가 마지막으로 일했던 무덤 근처, 우체국에 들러 그린 게이블이 그려진 엽서 한 장을 샀다. 그곳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의 내게 엽서를 썼다. 그리고 얼마 전,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서 날아온 그 엽서를 받았다. 엽서에는 ‘Anne of Green Gables’라는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엽서에는 열한 살의 ‘앤’이 아니라, 마흔셋의 내가 ‘앤’에게 보내는 말이 적혀 있었다.
 
“앤 셜리. 네가 한 모든 말이 맞는 건 아니었어. 하지만 나는 언제나 네 말이 맞길 간절히 바라며 살았단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 어딘가에서 잠시 쉬다가 본 풍경

프린스 에드워드 섬 어딘가에서 잠시 쉬다가 본 풍경

작가가 작품을 아이에 비유하는 건, 그것이 완성되기까지의 고통 때문이다. 어쩌면 사랑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결국 그런 것들인지 모른다. 우리는 헌신하는 것들과만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매튜 아저씨가 틀렸다. 앤을 키우면서 구원받은 건 오히려 독신주의를 고집했던 이들 남매였다. 혼자 있길 좋아한다는 말은 같이 있음을 전제할 때에야 가능해지는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랑이든 우정이든 결국 ‘떠날 필요가 없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떠날 필요가 없는 관계, 어쩌면 그것이 앤과 내가 만든 33년간의 관계였는지 모르겠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서 온 엽서를 나의 작은 소녀인 듯 끌어안았다. 다시 그곳에 되돌아가리란 새로운 소망 하나를 품어 보면서. ●   
 
 
글 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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