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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조민호의 이렇게 살면 어때(9) “거창에서 처음으로 쓴맛을 보다~”

중앙일보 2017.08.08 12:00
지난해 돌아가셨지만 내겐 백부님이 한 분 계셨다. 생전에 명절을 맞아 인사차 들르면 늘 이렇게 안부를 물으셨다.
 
“요즘 경기가 안 좋으니, 간판 만들 일은 많겠네. 많이 바쁘지?”
 
동네 치킨집 간판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걸 보시고, 망한 치킨집 사장님에 대한 안타까움 보다 새로운 치킨집의 새로운 간판을 만들고 있을, 서울에서 광고한다는 조카가 떠오르셨던가 보다. 연세가 있으시니 광고를 간판 만드는 일 쯤으로 아셨을 거다.  
하물며 카피라이터라고 하면…
 
 
이름도 짓고, 레이블 카피도 써 가조 영농조합 김 사장님께 보여드린 ‘도라버리지’ 도라지 조청. 대박을 예감했지만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는 쓴맛을 본 비운의 네이밍이 되고 말았다. [사진 조민호]

이름도 짓고, 레이블 카피도 써 가조 영농조합 김 사장님께 보여드린 ‘도라버리지’ 도라지 조청. 대박을 예감했지만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는 쓴맛을 본 비운의 네이밍이 되고 말았다. [사진 조민호]

 
요즘 이곳 거창 가조영농조합 김 사장님은 도라지 조청에 푹~ 빠져 계신다. 만드는 방법이 옆에서 보기에도 딱하다. 도라지를 달여 그 물을 섞어 만들어도 도라지 향이 배어서 누구도 도라지 조청을 개나리 조청이라고 안 할텐데 도라지를 말리고 가루로 내어 달여 만드니 도라지가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도라지 한 말을 말리고 가루로 빻아봐야 겨우 조청 한 병을 만든단다.
 
“그래야 도라지 맛이 깊어지거든예. 약효도 좋고예” 한다.  
 
그 많은 도라지를 말리고 가루 내고 빻고 달이고 하는데 도대체 얼마를 받을 것이며, 누가 그 값 내고 사 먹을까 싶어 딱해 하고 있는데… “광고 하셨다면서예. 조청 이름 좀 지어주이소~” 하신다.
돌아가신 백부님 생각이 났다.  
 
‘도라버리지’ 도라지 조청!
 
 
도라버리지 도라지 조청 레이블 확대. [디자인 조민호]

도라버리지 도라지 조청 레이블 확대. [디자인 조민호]

 
잘 팔릴 거 같지 않나? 
김 사장님의 고민과 고생, 좋은 도라지 조청을 향한 그 지고지순한 사랑이 팍팍~  
몇 만원 씩 주고서도 사 먹고 싶다는 느낌이 파바박~
며칠을 고민해 짜잔~ 하고 보여 드렸다.
 
김 사장님의 표정이 묘하다. 웃기는 하시는데 도라지를 날 걸로 씹어 드신 듯 하다.
 
회사에 다닐 때, 프레젠테이션이 끝나면 먼저 광고주의 표정에서 프레젠테이션의 성공과 실패를 읽어 낸다. 아이디어를 내는 일 보다, 사람들 표정에서 반응을 읽어 내는 일에는 광고쟁이가 도사다.
 
 
포월침두 마당에 도라지꽃이 피었다. 도라지 쓴 맛이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 예쁜 보라빛이다. [사진 조민호]

포월침두 마당에 도라지꽃이 피었다. 도라지 쓴 맛이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 예쁜 보라빛이다. [사진 조민호]

 
“사장님~ 농담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도라버리지’ 라고 짓자고 하겠습니까. 핫핫핫”
 
김 사장님 표정이 다시 밝아진다. 술 한 잔 안 드시는 분이 앞에 놓인 맥주잔을 시원하게 들이킨다.
“아~ 돌아버리는 줄 알았네” 하는 속이 훤하게 보인다.  
“얘한테 이런 거 부탁하면 안 되겠네” 하는 다짐도 보인다.  
 
나 아직 눈치 빠른 광고쟁이 맞지? ㅋㅋ
 
조민호 포월침두 주인 minozo@naver.com
 
 
[제작 현예슬]

[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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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호 조민호 포월침두 주인 필진

[조민호의 이렇게 살면 어때] 퇴직은 갑자기 찾아왔다. 일이 없는 도시의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고, 이러다 죽는 날 아침에 “뭐 이렇게 빨라, 인생이?” 할 것 같았다. 경남 거창 보해산 자락, 친구가 마련해준 거처에 ‘포월침두’라는 이름을 지어 붙이고 평생 처음 겪는 혼자의 시간을 시작했다. 달을 품고(抱月) 북두칠성을 베고 자는(枕斗) 목가적 생활을 꿈꿨지만 다 떨쳐 버리지 못하고 데려온 도시의 취향과 입맛으로 인해 생활은 불편하고 먹거리는 가난했다. 몸을 쓰고, 글을 쓰자. 평생 머리만 쓰고 물건 파는 글을 썼으니 적게 먹어 맑은 정신으로 쓰고 싶은 글, 몸으로 쓰는 글을 쓰자, 했다. 올 3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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