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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훈의 시시각각] 황병헌 판사를 지지하는 이유

중앙일보 2017.08.05 01:20 종합 26면 지면보기
고대훈 논설위원

고대훈 논설위원

황병헌 부장판사가 몰랐을 리 없다. ‘블랙리스트 사건’ 1심 재판장인 황병헌은 신상털이 보복을 예상했을 것이다(그와는 일면식도 없다). 그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징역 3년형을 내렸고, 조윤선 전 문화체육부 장관을 집행유예로 석방했다. 군중의 뜻을 거슬렀다. ‘적폐 판사’라는 딱지가 붙고, 인신공격성 마녀사냥이 범람했다. 특검이 구형한 대로 6~7년의 중형을 때렸다면 피할 수 있었다. ‘국정농단 부역자’를 엄벌하라는 시대정신을 외면했다는 비난은 타당한가.
 

블랙리스트 판결에 ‘적폐 판사’ 딱지
여론재판 굴복 않고 법의 지배 확인

김기춘·조윤선의 판결문을 들여다봤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 범죄 사실, 법리(法理), 공소 제기의 적법성, 양형 이유, 무죄에 대한 판단 등이 200쪽 넘게 빼곡히 담겨 있었다. 김기춘의 인식은 이데올로기적 대결의 틀에 한심하게 갇혀 있었다.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좌파는 잘 먹고 잘사는데 우파는 배고프다’ ‘종북세력이 문화계를 장악했다’고 이해했다. 그러곤 ‘전투 모드를 갖춰 불퇴전의 투지를 갖고 좌파세력과 싸워 나가라’고 다그쳤다. 권위주의 시절로 회귀하려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박근혜 정부의 신데렐라’ 조윤선의 경우 블랙리스트에 가담한 심증은 가지만 딱 떨어지는 증거가 부족했다. 여기까지는 ‘면죄부 판결’이라며 분노하는 게 당연하다.
 
판결문을 읽다가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이라는 낯선 표현에 멈춘다. 우리 정부가 예술 활동을 지원하되 ‘팔 길이만큼 거리를 두고’ 예술의 독립성을 존중하는 무간섭주의를 표방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황병헌은 블랙리스트 사건을 팔길이 원칙을 부정한 ‘범행’으로 판단했다. 판결문은 “헌법이 보장한 문화 표현과 활동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침해했다”고 썼다. 자기편을 심고 챙겨 주는 이데올로기적 문화권력의 행태에 비춰볼 때 뼈아픈 지적이다.
 
‘위법 명령과 복종 의무’라는 대목에서 한 번 더 서게 된다. 대법원 판례가 인용됐다. “상관의 명백히 위법한 명령인 때에는 복종할 의무가 없으며, 그 명령에 따라 범죄 행위를 했다고 해서 부하의 위법성이 조각(阻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문체부의) 노태강 국장과 진재수 과장, 참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 인사조치 하라’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를 따른 김상률 전 교육문화수석,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에게 죄를 물었다. 판결문은 “직업공무원 제도를 침해한 위법하고 부당한 지시가 명백한데도 적극 이행한 것은 적법하지 않다”고 적었다.
 
황병헌은 블랙리스트 사건을 단죄할 처벌 근거를 찾아냈다. 사문화된 팔길이 원칙을 잊혀진 기억 속에서 살려냈다. 대통령일지라도 상관의 위법한 지시는 거부하라는 점을 일깨웠다. 그의 판단과 형량에 오류가 있고 2심에서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법리와 증거를 따져 죄값을 매기려 한 노력은 인정해 줘야 한다. 조윤선 석방을 욕하면서 불구속 상태의 김상률에게 징역 1년6월을 내려 법정구속한 일은 왜 모른 척하는가. 요즘처럼 권력 교체기에 팔길이 원칙을 무시하며 완장질 하고,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굵직한 정책을 윗분의 말씀이라고 무작정 밀어붙이는 게 옳은지 곱씹어 보게 하는 의미 있는 판결이다.
 
8월과 10월로 예정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박근혜 재판에서 재판장의 선고 장면이 TV 생중계될 공산이 크다. TV에 나오지도 않은 황병헌에 대한 맹목적 테러가 이 지경일진데 TV 앞에 설 판사가 여론의 압박을 떨쳐 내기란 쉽지 않다. 실체가 불분명한 여론과 통념에 굴복할까 벌써부터 걱정된다. 여론재판이 법의 지배를 압도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적폐 판사’라는 주홍글씨를 각오한 황병헌을 평가하는 이유다. 
 
고대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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