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했던 의혹들 사실로 드러나
국정원장이 앞장서 불법 독려 충격
정치보복으로 흐르는 건 경계해야
이런 사실은 가뜩이나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국가 안보를 책임져야 할 국정원이 여론 조작을 통한 정권 유지·강화에 전념하는 친위부대 역할을 하고 나아가 대선까지 개입했다는 의심을 사기 충분한 것이다. 현행 국정원법은 정보기관의 국내 정치 개입을 엄격하게 금지한다. 하지만 지난달 ‘국정원 댓글’ 사건 파기환송심 결심공판에서 검찰이 공개한 녹취록은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이 오히려 불법을 독려하는 태도를 드러내 국민을 놀라게 했다.
녹취록에 따르면 그는 2009년 전 부서장 회의에서 “지자체장이나 의원 후보들을 잘 검증해 어떤 사람이 (정부에) 도움이 되겠느냐(를 판단해) 시·구의원에 나가게 해야 한다”고 말해 지방선거 공천에까지 개입한다는 의심을 샀다. 그는 또 비판적 언론매체에 대한 대응이 소극적인 직원들에게 “(언론이) 잘못할 때마다 쥐어 패는 게 정보기관의 역할”이라고 질책하는 등 사실상 언론통제를 지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거대 정보기관이 국내 정치에 불법 개입하고 언론탄압에 나선 것은 21세기에 상상하기 어려운 야만적 민주주의 파괴행위다. 특히 국정원장이 그러한 불법을 직접 지시하고 독려했다는 데서는 고개가 절로 흔들어진다. 철저한 조사를 통해 낱낱이 사실을 밝혀내고 관련 책임자들을 엄벌해야 한다.
다만 이른바 ‘적폐 청산’이 전 정권에 칼날을 휘두르는 정치보복으로 흐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렇잖아도 현 정부는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캐비닛에서 발견했다는 문건을 흘리는 식의 행태로 정치보복 의심을 받고 있다. 이번 사건이 그런 소리를 듣는다면 국정원 적폐의 청산은 또다시 공염불이 되고 새로운 정치보복의 빌미를 만드는 악순환을 낳을 수 있다.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아 서두를 수밖에 없다고 해도 일체의 사감(私感) 없이 법치의 원칙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 그래야만 가능한 게 ‘청산(淸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