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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출발 늦어 불안’ 편지에 ‘오늘을 버티는 멋진 당신’ 답장

중앙일보 2017.08.05 01:00 종합 14면 지면보기
손편지·우체통·전화부스 … 아날로그 감성 되살리는 사람들
익명으로 고민을 담은 편지를 넣으면 자원봉사자들이 손편지로 답장을 해주는 ‘온기우편함’을 만든 대학생 조현식(27)씨는 “손편지로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손편지 답장은 2주 뒤쯤 배달된다. [최규진 기자]

익명으로 고민을 담은 편지를 넣으면 자원봉사자들이 손편지로 답장을 해주는 ‘온기우편함’을 만든 대학생 조현식(27)씨는 “손편지로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손편지 답장은 2주 뒤쯤 배달된다. [최규진 기자]

서울 종로구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정독도서관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작은 나무 상자가 있다. 담벼락에 세워진 상자에는 ‘온기우편함’이라는 이름과 함께 이런 안내문이 적혀 있다.

고민 상담 ‘온기 우편함’
고민 써서 넣은 2주 뒤 손편지 위로
자원봉사 60여 명이 일일이 답장

디지털 메시지엔 없는 마음 담겨
매주 200통 쌓여 … 설치 요청 잇따라

목소리 기부 공중전화 부스
누구나 글 써서 수화기에 녹음
시각 장애인 위한 오디오북 제작

휴대폰에 밀려 버려진 추억의 공간
사랑과 정 나누는 장소로 재탄생

 
“소중한 고민을 익명으로 넣어주시면 느린 손 걸음으로 답장을 보내 드립니다.”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우편함이 시키는 대로 고민을 담은 익명의 편지를 보내봤다. “30대에 접어들면서 더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구들과 나를 비교하게 된다”는 고민과 집 주소를 적었다. 편지를 보낸 사실조차 잊고 있던 2주 뒤 집에 편지가 도착했다. 역시 익명으로 돌아온 편지에는 “인생의 다음 챕터는 정해진 게 아니라 사람마다 다른 게 아닐까라고 생각해요. 오늘을 버티는 당신의 모습이야말로 진정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정성 가득한 손편지에 피식 미소가 지어졌다.
 
아날로그의 반격일까. 디지털이 대세인 시대에 손편지와 같은 아날로그적 가치를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 종이 노트와 LP판 구매에 관심이 높아지는 현상도 그중 하나다. 온기우편함도 잊혀진 감성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온기우편함 안내문. [최규진 기자]

온기우편함 안내문. [최규진 기자]

◆2000개의 고민에 손편지 답장=우편함을 만든 주인공은 20대 청년이다. 지난 2월 첫 온기우편함을 만든 대학생 조현식(27)씨는 “고민이 많아도 털어놓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생각했다. 작은 손편지로라도 작은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고 말했다.
 
답장을 쓰는 사람은 전국에서 모인 60여 명 ‘온기우체부’들이다. 100% 자원봉사자들이다. 정성을 담은 고민 상담을 위해 규칙도 만들었다. 10대 고등학생들의 진학 고민에는 20대 이상의 우체부만 답장을 하는 식이다.
 
요즈음 온기우편함에는 매주 200통 안팎의 편지가 쌓이고 있다. 조씨는 “입소문을 타면서 ‘우체부에 지원하고 싶다’거나 ‘지방에도 설치해 달라’는 요청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옛날의 손편지에는 디지털 메시지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 담긴다는 걸 알리고 싶다”며 환하게 웃었다.
 
‘우체통 살리기’를 진행하는 박대수씨. [최규진 기자]

‘우체통 살리기’를 진행하는 박대수씨. [최규진 기자]

◆‘우체통 살리기’ 프로젝트=길에서 흔히 보였지만 지금은 사라져 가고 있는 빨간 우체통을 지키겠다고 나선 이들도 있다. 화가 박대수(31)씨는 2013년부터 서울 문래동 예술촌에서 우체통을 지키기 위한 ‘우체통 살리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우정사업본부는 3개월간 편지가 없으면 우체통을 철거한다. 전국에서 해마다 평균 1734개의 우체통이 사라지고 있다. 남은 우체통은 1만4026개다.
 
박씨의 프로젝트는 간단하다. 그에게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기만 하면 된다. 박씨는 “하고 싶은 말, 소원, 바람, 염원, 고민 등 어떤 말씀도 다 좋다”고 했다. 박씨는 편지를 보낸 사람들에게 직접 우체통을 그린 그림엽서를 보낸다.
 
박씨에게 우체통은 특별하다. 어린 시절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그에게 우체통은 세상과의 소통 창구이자 ‘위로’였다. 외로울 때면 스스로에게 쓴 편지를 우체통에 넣어 받아봤다고 한다. 그가 그린 그림에 항상 우체통이 등장하는 이유다. 박씨는 “편지를 처음 써 본다는 사람도 있었다. 손편지에서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소통을 잊지 않도록 더 많은 편지를 보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디오북을 녹음하는 공중전화 부스. [최규진 기자]

오디오북을 녹음하는 공중전화 부스. [최규진 기자]

◆공중전화 부스에서 목소리를 선물=스마트폰에 자리를 내준 공중전화 부스도 아날로그 감성이 충만한 공간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인근의 공중전화 부스에는 ‘우리는 모두 책을 읽을 권리가 있다’는 글이 쓰여 있다. 이곳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을 만들 수 있는 작업 장소다. 이른바 ‘글소리 부스’다.
 
글소리 부스에서는 누구나 목소리를 기부할 수 있다. 전화 부스에 놓인 책상과 의자에 앉아 자신이 원하는 글을 쓰고 수화기에 녹음하면 된다. 짧은 시부터 긴 수필까지 내용에 제한은 없다. 녹음된 파일이 어느 정도 쌓이고 나면 편집을 거쳐 오디오북으로 제작된다.
 
글소리 부스를 탄생시킨 이는 전업 작가인 김민관(31)씨다. 지난해 10월 시각장애인을 위해 ‘오디오북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김씨는 “시각장애인들이 점자책보다 목소리가 담긴 오디오북을 더 선호한다는 걸 알고 제작에 나섰다. 최대한 많은 시민이 재능 기부 형태로 동참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눈에 낡고 버려진 공중전화 부스가 눈에 들어 왔다. 그는 “공중전화 부스는 사람이 많이 다니는 장소에 이미 설치돼 있어 새로운 작업장을 만들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수년 전부터 휴대전화를 쓰지 않는 김씨는 잊혀져 가는 공중전화 부스를 되살리고 싶었다.
 
글소리 부스에서 근처를 오가는 시민들이 매일 30건 정도의 글을 녹음한다.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아 참여가 많지는 않다. 김씨는 “한 권이라도 제대로 된 오디오북을 만드는 게 최종 목표다. 옛날 사랑과 정을 나눴던 공중전화 부스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많은 시민이 봉사에 동참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2020년까지 공중전화 부스를 절반 수준으로 줄일 계획이다. 공중전화를 관리하는 KT링커스에 따르면 올해 5월 기준으로 전국의 공중전화는 6만2000여 대로 10년 전인 2007년(10만2000여 대)에 비해 39% 줄었다. “전국 공중전화 부스를 글소리 부스로 재탄생 시키고 싶다”는 욕심을 가진 김씨는 “예쁘게 꾸민 공중전화 부스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시민을 볼 때면 없애는 것보다 재활용 방안을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S BOX] 국내 유일 LP음반 공장 13년 만에 다시 가동
지난 6월 서울 마장동에는 13년 만에 LP 제작 공장이 다시 문을 열었다. 음반 제조업체인 마장뮤직앤픽처스가 국내 유일의 LP 제작 공장인 ‘바이닐 팩토리’를 가동시켰다. 최근 LP판의 인기가 솟구치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국제음반산업협회(IFPI)에 따르면 전 세계 LP 판매량은 2008년 500만 장에서 2015년 3200만 장으로 크게 늘었다.
 
LP판과 함께 필름 카메라, 몰스킨 종이노트, 보드게임 등 아날로그 시대의 유물들이 부활하고 있다. 필름 제조업체 코닥은 올해 4분기부터 전문가용 사진 필름인 ‘엑타크롬필름’을 다시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아날로그의 반격』의 저자인 캐나다의 문화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색스는 이런 현상을 두고 “아날로그가 새로운 유행으로 자리 잡았다”고 해석했다. 그는 “빠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은 아날로그가 각광받는 이유는 2030세대가 아날로그의 ‘즐거움’에 매력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고 분석했다. LP의 경우 턴테이블에 음반을 놓고 바늘을 얹어 음악을 감상하는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이 디지털 음원의 편리함과 높은 음질을 상쇄한다는 주장이다.
 
최규진 기자 Choi.ky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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