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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형대 오른 ‘거위’ 얀 후스, 100년 뒤 ‘백조’ 루터를 예견하다

중앙일보 2017.08.04 01:00 종합 21면 지면보기
종교개혁 500년-현장을 가다<상> 독일 콘스탄스 
독일 콘스탄스의 호수에 세워진 동상. 이곳은 중세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가 화형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독일 콘스탄스의 호수에 세워진 동상. 이곳은 중세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가 화형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그 무렵은 새벽이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린 게 1517년. 그로부터 꼭 102년 전이다. 시대의 어둠이 가장 짙을 때였다. 독일 남부의 도시 콘스탄스에서 화형식이 열렸다. 종교개혁을 알리는 새벽닭의 죽음, 주인공은 얀 후스(1369~1415)다. 체코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가톨릭 사제였다. 프라하 대학의 신학부 교수와 총장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당대의 명망가였다. 그런 후스를 화형에 처한 이는 다름 아닌 로마 가톨릭이었다.
 
올해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최근 종교개혁지 순례차 독일 콘스탄스를 찾아갔다. 거대한 호수를 낀 채 스위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무척 아름다운 휴양도시였다. 주말이면 스위스 사람들이 물가가 싼 독일로 장을 보러 오는 바람에 교통체증이 일기도 했다.
 
콘스탄스 호수의 창녀 동상. 당대 최고 미녀로 꼽히던 그녀 손에 교황과 황제가 벌거벗은 채 앉아 있다.

콘스탄스 호수의 창녀 동상. 당대 최고 미녀로 꼽히던 그녀 손에 교황과 황제가 벌거벗은 채 앉아 있다.

나는 호숫가로 갔다. 그곳에 360도 회전하는 높다란 동상이 하나 서 있었다. 가슴과 허벅지를 드러낸 반라의 여인상. 높이 9m에 무게가 18톤이다. 여인은 당대 최고의 미모로 꼽히던 콘스탄스의 창녀다. 그녀의 양손에는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왼손에는 삼층관을 쓴 교황이, 오른손에는 왕관을 쓴 황제다. 둘 다 벌거숭이다. 교황은 다리를 꼬고 있고, 황제는 성기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체코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가톨릭 사제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

호숫가의 창녀 동상은 600년 전의 시대상을 폭로하고 있었다. 당시 교황은 무려 세 명이었다. 교황청도 로마와 프랑스 아비뇽, 두 곳이었다. 서로가 “내가 진짜 교황”이라고 정통성을 주장하며 치고 받고 있었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면죄부(면벌부)를 판매하며 타락한 채 분열돼 있었다.
 
후스는 그런 교회 권력의 심장부를 향해서 칼을 겨누었다. 타깃은 ‘교황’이었다. 후스는 “면죄부(면벌부)를 파는 교황은 가롯 유다와 같다”고 선언했다. 유다는 예수를 유대인에게 팔아넘겨 결국 숨지게 한 인물이다. 그런 유다에 교황을 빗댔다. 중세 암흑기에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지를 수 없는 도발이었다.
 
나는 호수에 설치된 데크길을 따라 동상 앞으로 갔다. 장관이었다. 지상 최고의 권력자가 창녀의 손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겉을 보면 성(聖)과 속(俗)의 만남이지만, 들추어 보면 욕(欲)과 욕(欲)의 만남에 불과했다. 콘스탄스 푸른 호수에는 예쁘고 아담한 요트들이 떠 있었다. 600년 전, 후스도 이 자리에서 저 풍경을 바라봤다. 그가 바라본 호수는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았으리라.
 
당시 가톨릭 교회의 미사와 강론은 모두 라틴어로 진행됐다. 후스는 교황청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반격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 밖으로 나가서 설교를 했다. 라틴어 대신 체코의 언어를 택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자신들의 모국어로 가슴에 날아와 꽂히는 성서의 메시지에 환호했다. 게다가 후스는 체코어로 성서까지 번역했다. 후스는 대신학자이자 대설교가였다.
 
화형 당하는 후스의 모자에는 ‘이 자는 이단의 두목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화형 당하는 후스의 모자에는 ‘이 자는 이단의 두목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콘스탄스의 호숫가에는 지금도 거대한 저택이 한 채 있었다. 600년 전, 이곳에서 콘스탄스 공의회가 열렸다.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의 최고결정기관이다. 가톨릭에 교황이 셋이나 되고 대립이 심해지자 지기스문트(1368~1437)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고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했다. 공의회는 당시 ‘뜨거운 감자’였던 후스를 콘스탄스 종교재판에 소환했다.
 
주위 사람들은 말렸다. “가면 죽일 것이다” “절대 가지 마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지기스문트 황제가 안전을 보장했다. 황제는 두 차례나 사신을 보내 “이땅에서 이단 정죄(定罪)가 사라지게 만들겠다”며 신변 보장을 약속했다. 후스는 콘스탄스로 갔으나 체포돼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나는 후스가 갇혔던 수도원 건물로 갔다. 지금은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있다. 후스가 석 달간 갇혔던 성탑처럼 생긴 감옥은 남아 있었다. 후스는 이곳에서 고초를 겪었다. 낮에는 쉼없이 걸어야 했고, 밤에는 벽에 묶여 있어야 했다. 누울 수가 없었다. 당시 후스는 지독한 치질과 두통으로 고통을 겪었다.
 
콘스탄스 공의회가 후스를 정조준한 핵심적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건 예수에게서 부여받은 교황의 절대 권위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었다. 신약성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너는 베드로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6장 13~19절)
 
이 구절을 바탕으로 가톨릭 교회는 베드로를 ‘제1대 교황’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대를 잇는 교황들마다 예수가 직접 부여한 ‘반석의 권위’가 있다고 믿는다. 그 위에 교회가 서 있다고 생각한다.
 
루터 “알든 모르든 우리는 모두 후스파”
훗날 후스파들이 화형을 당한 자리에 그려놓은 십자가.

훗날 후스파들이 화형을 당한 자리에 그려놓은 십자가.

 
후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반석’을 베드로라고 해석하지 않았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봤다. 신의 속성을 온전히 공유하는 예수의 속성. 그게 바로 ‘하느님(하나님) 나라의 속성’이다. 후스는 그런 속성이야말로 그리스도 교회를 세우는 반석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후스의 해석은 중세 가톨릭 교회의 심장을 찔렀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가톨릭 교회 체제의 뼈대가 무너질 판이었다.
 
결국 후스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1415년 7월 16일, 토요일 아침이었다. 후스는 사형장으로 끌려나왔다. 죽음을 코 앞에 두고서도 후스는 황제를 향해 종교개혁의 절박함을 역설했다. 황제는 얼굴이 붉어진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지기스문트 황제는 후스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공의회의 주최 측은 왕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였다. 후스를 어떻게 처리할지도 교회의 권한이었다.
 
100년 후에 마르틴 루터도 후스와 똑같은 곤경에 처했다. 보름스 제국회의에 오라는 요청이었다. 주위에서는 다들 말렸다. 가면 틀림없이 죽일 것이라고 했다. 고심 끝에 루터는 제국회의에 참석했다. 황제와 추기경들 앞에서 조금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그런데도 화형을 당하지 않았다. 제국회의의 주최 측이 교회가 아니라 제후들이었기 때문이다. 제후들은 굳이 루터의 목숨을 앗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콘스탄스 공의회의 주최 측은 제후가 아니라 교회였다.
 
종교재판소에서 “입장을 번복하면 파문을 면하고 목숨을 구할 것”이라는 마지막 제안을 받았지만 후스는 거절했다. 그는 “내 입장을 번복하면 신 앞에서 죄가 될 것”이라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후스의 머리카락은 면도칼로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깎였다. 머리에는 고깔 모자를 씌웠다. 거기에는 ‘Hic est heresiarcha(이 자가 이단의 두목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후스를 향한 조롱이었다.
 
후스가 콘스탄스에서 갇혔던 뾰족한 성탑 모양의 수도원 감옥.

후스가 콘스탄스에서 갇혔던 뾰족한 성탑 모양의 수도원 감옥.

나는 콘스탄스 호숫가의 부두를 거닐었다. 호수 가운데 솟은 말뚝에 가마우지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후스가 갇혔던 감옥은 불과 5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 땅에서 맞았던 마지막 밤. 후스는 감옥의 창을 통해 호수 위로 떠오른 달이라도 보았겠지. 그 달을 보며 후스는 기도를 올리지 않았을까. 이튿날은 토요일이었다. 주일을 하루 앞둔 날, ‘회개하지 않은 이단자’ 후스는 불타야 했다.
 
날이 밝았다. 후스는 나무기둥에 몸이 묶였다. 주위에는 짚과 장작이 놓였다. 후스가 마지막에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너희는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태워 죽인다. 그러나 100년 후에는 태울 수도 없고, 삶을 수도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후스’는 체코어로 ‘거위’를 뜻한다. 생전에 후스는 자신을 종종 거위에 빗댔다. 후스가 예견한 ‘백조’는 과연 무엇일까. 사람들은 백조가 100년 후에 등장하는 ‘마르틴 루터’라고 해석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무리 태워도, 아무리 삶아도 거스를 수 없는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이다. 그 가운데 마르틴 루터가 서 있었다.
 
후스는 파문과 함께 죽었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톨릭 사제)가 파문당하기 100년 전에 말이다. 개혁을 부르짖던 후스의 저술들은 불태워졌다. 당시에는 인쇄술도 없었다. 일일이 손으로 필사하던 시절이었다. 인쇄술 혁명의 덕을 톡톡히 본 루터와 달리 후스의 저술은 널리 퍼져나가지 못했다.
 
후스가 죽고서 105년이 흘렀다. 1520년 2월에 후스의 저술을 읽은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모르든 알든 우리는 모두 후스파다.”
 
종교개혁의 여명기, 거기에는 얀 후스가 있었다. 마르틴 루터 이전에 말이다.
 
콘스탄스(독일)=글·사진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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